서유석 경상국립대 국어국문학과·문화콘텐츠연계전공 교수
다른 대학에서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필자가 속한 경상국립대는 학생들과의 상담이 선생의 의무사항이다. 상담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얼마나 그들의 고민을 잘 듣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진심 어린 속내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과의 상담은 쉽지 않다. 선생이 일방적으로 훈계조로 떠들기만 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겁도 나고, 학생들의 고민을 듣다 조언이라고 건넨 뒤 속칭 ‘꼰대’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할뿐더러, 나의 20대 시절을 학생들의 20대에 그대로 대입해서 속칭 ‘라떼는 말이야’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수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정작 할 말이 없다. 나누어야 할 이야기나 정보는 산더미인데, 뭔가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 개개인의 미래 혹은 꿈에 관한 이야기일 경우 더 그렇다. 어른들은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며, ‘나도 젊었을 때는 고생 많이 했다’ 식으로 위로 혹은 위안, 더 나아가 공감을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필자가 살아온 20대 시절과 지금 20대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다르기에 섣불리 공감의 제스처를 취하고 위로하려는 시도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요즘 학생들, 특히 지역 학생들에게 소위 ‘하고 싶은 일’ 다시 말해서 ‘꿈’과 ‘미래’라는 건 생각해볼 수조차 없는 사치처럼 여겨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사실 우리는 그 ‘무엇’이 되긴 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무엇’의 크기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의 크기가 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20대를 위로한답시고,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희망을 팔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보라는 말은 폭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이 되어야 하지만, 그 ‘무엇’은 이제 철저히 개인적인 가치와 행복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살면서 그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진 자본과 기반이 저마다 상이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면서 뚜벅뚜벅 내딛다 보니 운이 좋아 사회적 성취에 다다른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한국식 능력주의자들은 자신이 얻은 성취를 모두 자신의 힘으로만 생각하고, 그 폐해는 지금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되려고 사는 삶보다, 어떻게 ‘무엇’이 되어가야 하는지를 설명할 때다. 그게 이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소위 나이 더 먹은 어른이라 불리는 작자들이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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