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 픽션을 입는다] (1)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 픽션을 입는다] (1)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1.0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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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그냥·그러네, 회한이 묻어있는 듯한 이런 마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이 경우도 그렇습니다.

새해맞이로 경남일보에서 땅을 한 자락 내주셔서 글꽃 농사를 한번 지어보려 합니다. 트랙터 같은 큰 기계로 땅을 갈아엎고 드론으로 씨를 뿌리는 그런 농사가 아니라, 쟁기나 훌칭이로 골을 내고 괭이로 흙을 고르지요. 그러면 ‘음메’ 하는 송아지도 한 마리 있어야 하겠지요. 밀레의 농부처럼 손으론 씨를 뿌리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이런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화를 나는 좋아합니다. 어떨 땐 배추장다리 꽃밭에 나비 날고, 익어가는 밀밭 그늘에 보리서리 해다가 그슬린 이삭 비비며 혼자 노래하는, 글밭엔 그런 순이도 있습니다.

너와 내가 밀밭에서 서로 만나서 / 키스를 한대도 누가 아나요 / 우리 둘이 밀밭에서 나온다 해서 / 웃을라면 웃으라지 집으로 간다네 / 밀밭에서 나왔다고 왜들 야단이야 / 숨겨놓은 정든 님 하나 누구는 없나 / 숨겨놓은 정든 님 하나 누구는 없나. 이런 풋풋한 로망도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큰 글눈(제목)에 왜 ‘수필’이라 쓰지 않고 ‘에세이’를 썼을까? 눈여겨보기보다 예사 ‘에세이’를 ‘수필’로 읽으시리라 여깁니다. 그게 보편화 되었으니까요. 잡지들 이름을 봐도 그렇습니다. 에세이·에세이포레·에세이스트·에세이21·에세이문학 이렇게 에세이를 쓰거나 수필·수필세계·수필문학·수필미학·수필과비평·수필문예처럼 수필을 쓰거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이 두 개의 낱말이 지니는 개념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지요.

‘이제 배정인 씨는 에세이스트로서 수필문학을 창조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되었다.’

내가 처음 잡지 ‘에세이’(당시는 ‘월간 에세이’)에 작품이 천료 되었을 때 추천사를 주신 ‘심사위원일동’의 이름으로 제게 달아준 이름표가 ‘에세이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필가라는 좋은 우리말 놔두고 뭐 한다고 아메리카나를 써.’ 이런 생각이었으니까요.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이름표를 하나 얻어 단다는 것은 정말 조심스럽고 무섭기까지 하죠. 나는 이 명찰을 달고 나서 깨달았는데요, 이른바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까 내가 ‘수필’이나 ‘에세이’나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는 겁니다. 어쩌다 엄벙덤벙하다가 받긴 했는데, 이름표를 달고 다니려면 이름값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책도 뒤적거리고 남의 말도 들어보고, 그러다 보니까 놀랍게도 隨筆(수필)이라는 낱말이 일본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일본 하면 죽창가를 불러야 한다는 이 나라에서 어째? 이거 이대로 써야 할까? 기분이 좀 뜨부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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