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진주성 전투, 일본 두부의 새 역사를 쓰다
[경일춘추]진주성 전투, 일본 두부의 새 역사를 쓰다
  • 경남일보
  • 승인 2022.01.1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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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중국으로 간 조선인 중 황제의 첩이 된 양가집 규수도 있었고 술을 담거나 두부를 만드는 집찬비도 있었다.

명나라 황제 선덕제(재위 1425∼1435)는 세종에게 “이번에 조선에서 보내온 집찬비들의 두부 만드는 솜씨가 지난 번 만 못 하니, 영리한 여자 열 명을 뽑아 잘 교육시켜 다시 보내라”고 주문서를 보냈다.

조선의 두부는 명나라 황실에까지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 명성이 말썽이었다. 임진왜란 때 지원병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군사들이 두부를 요구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으로 군사들의 식사가 제때 지급되지 않자, 명나라 군대는 민가와 관아를 약탈했다. 조정에서는 “함부로 백성을 때리고 밥을 빼앗아 먹는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하되, 군사들에게 지급할 식사의 규정을 정했다.

고급 장교에게는 고기, 두부, 채소, 생선자반, 밥, 술 석 잔을 올리는 ‘천자호반’, 초급장교에겐 고기, 두부, 채소, 밥을 제공하는 ‘지자호반’, 일반 군사들에겐 두부, 새우자반과 밥인 ‘인자호반’ 이 제공되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에 따르면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박호인(朴好仁)이란 자가 왜적에게 붙잡혀 도사국(土佐國) 고찌(高知)에서 두부를 만든 것이 근세 일본 두부제조의 시초다.

간혹 진주성전투가 아닌 웅천전투라는 설도 있으나 웅천전투는 반나절 만에 조선군의 시신이 산더미를 이루었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퇴각했고 왜군도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성 전투 때 피로인이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짐승처럼 줄에 묶여 일본 노예 시장에 전시됐다. 진주 백성들이 워낙 많아 일본 교토의 요도강 기슭에는 ‘진주도(晉州島)’라는 마을까지 생겼다.

두부는 원래 사찰의 단백질원이었다. 조선시대 진주에는 사찰이 많았다. 쌍계사를 비롯해 서부경남의 큰 사찰들이 진주에 속했다. 양반들은 사찰에서 두부 먹는 모임을 가졌다. 두부의 육수를 내기 위해 닭을 잡았다. 승려들에겐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진주성에서 건너간 전통 조선 두부는 풍미가 그윽하고 단단하다. 두부에 켜켜로 양념한 쇠고기를 넣어 미나리로 묶은 두부선과 오색고명을 얹은 두부찜, 잘 끓인 연포탕은 나리들의 상에 오르는 최고의 교방음식 중 하나였다.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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