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 후추 잣 매실로 양념한 조선시대 진주냉면
[경일춘추] 후추 잣 매실로 양념한 조선시대 진주냉면
  • 경남일보
  • 승인 2022.02.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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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이학박사)
 

 

1983년 브리태니커사에서 발행한 ‘한국의 발견’은 장조림 간장과 두부전을 얹은 진주냉면을 소개했다. 진주에서는 납일(동지 후 세 번째 未日)에 꿩을 잡는 풍속이 있었다. 집집마다 해묵은 간장으로 꿩장조림을 만들었다. 묵처럼 되직해진 장조림 간장을 한 수저씩 떠 넣어 냉면을 말고 떡국도 끓였다. 관아의 냉면은 다른 형태였다.

/누가 국수를 만들어 곱게 뽑았나/호초와 잣, 소금 매실 두루 갖추었네/(椒柏鹽梅色色兼·초백염매색색겸)1898년 겨울, 진주목 고성의 수령이 기록한 관아의 냉면이다. 양반의 음식에는 백염매(柏鹽梅, 매실소금)를 썼다. 육수는 꿩탕과 살얼음이 뜬 동치미 국물을 섞었다. 진주 백성들은 해마다 요역(노력봉사) 품목으로 꿩 1407마리를 관아에 바쳐야 했다.

구한말 번화한 상업도시였던 진주에는 돼지고기 냉면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1900년 진주 선비 계남 최숙민(1837-1905)은 당시 시판되는 냉면에 대해 ‘의사들이 꺼리는 사악한 음식’ 이라는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1920년 일본 간장의 대명사인 기코만 장유공장이 진주에 설립되었다. 당시 진주에서 유행한 일본 간장은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급조한 산분해간장으로 단 맛의 화학물질이었다.

술을 마신 후 냉면을 먹는다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은 기후가 추워 술이 독한 관서지방의 문화다. 진주냉면이 권번과 기방의 야참이었다는 말도 와전된 것이다. 권번은 기생 양성기관이었고 기생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손님상에서는 절대 음식을 입에 대지 못 하는 것이 진주권번의 엄격한 규율이었다.

1932년 함흥 철공소 사장이 국수기계를 처음 개발해 냉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이 누들로드가 되었다. 진주냉면은 배달이 밀리고 밀릴 만큼 성업이었다. 소고기 편육과 배고명을 얹은 수정집 냉면이 가장 인기였다. 진주냉면은 6.25 전쟁 이후 소실되었다. 이후 몇 곳만이 명맥을 잇다가 1966년 중앙시장의 대형화재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03년 진주시청은 지역 관광상품 개발을 위한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면서 진주냉면을 새롭게 기획했다. 새 옷을 입은 진주냉면은 해물육수에 육전을 얹는 형태로 진주의 향토음식으로 사랑 받고 있다.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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