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천년 충절 저항의 인문도시, 진주여! 영원하라
[경일춘추]천년 충절 저항의 인문도시, 진주여! 영원하라
  • 경남일보
  • 승인 2022.03.0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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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1080년전 고려 태조(940)때 강주(康州)에서 진주로 지명이 바뀐 이후, 진주는 경상남도 서부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의 명산인 지리산과 덕유산의 영천(靈泉)이 모여 남강을 이룬 고을로서 도심에 남가람이 굽이쳐 바다로 흐른다. 이끼 낀 진주성의 성돌마다 겨레의 얼 스며 있는 경남의 심장부이자 문화예술의 터전, 위국충절의 도시이다.

그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그들 선대의 시민성은 1000년 이상을 오직 충절과 저항의 인문도시로 전개돼왔다.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충절신이 많이 배출됐다. 고려 현종 원년(1010),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진주 출신 시랑공 하공진(侍郞公 河拱辰, ?∼1011)은 남쪽으로 몽진(蒙塵)하는 왕을 호위하던 중 자신이 볼모를 자청해 거란군을 물러나게 했다. 억류 된 뒤에도 온갖 회유(懷柔)에도 “충신 불사이군” 을 외쳐 죽임을 당함으로서 충과 절의(節義)를 다했다. 조선 초기 계유정란(1453)때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賜死)당한 충절신 충장공 정분이 있었으며, 세조 2년(1456)에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거열형에 처해진, 사육신의 한 분 충렬공 하위지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명의 왜구를 격멸하여 진주성 대첩을 이룩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순절이 있었고, 계사년(1593)전투에서는 10여만 명의 왜구에 의한 진주민 7만 민관군의 순의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도 있었다.

고려 신종(1200) 때 전국 최초의 진주민란과 조선 철종(1862) 때 ‘진주농민항쟁’은 진주인들의 저항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113년 전인 1909년, 타지역에서는 생각할수 없는 전국 최초의 지역 언론사 경남일보가 탄생했다. 1923년 혁명적 저항운동이자 전국 최초의 인권 회복운동인 ‘형평운동’의 고향도 진주이다.

진주 선대인들이 남긴 위대한 충절 및 저항정신은 천부(天賦)의 지령적(地靈的)환경에 의해 자생한 진주만의 유일한 인문학적 기개(氣槪)의 결과로 공인되고 있다.

하여, 오늘날 경남 진주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애향심은 물론, 더 큰 애국심으로 선대 어른들의 거룩한 인문학적 충절 정신과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을 새겨야한다. “충절과 저항의 도시, 진주여 영원하라”라고 한 번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 선대어른들이 우리들에게 남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강신웅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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