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9)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9)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3.0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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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더듬어가다 보면 말에도 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르네상스까지 라틴어가 공용어였다지요.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길이 될 수는 없겠습니다.

몽테뉴의 ‘Les Essais’가 3권으로 된 결정판이 나온 건 1588년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는 파스칼의 ‘팡세’와 함께 여지껏 교양교육의 중심교과로 가르쳐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왜 이 책을 이렇게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을까? 내용이 훌륭해서겠지만, 몽테뉴는 라틴어로 고급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로 글을 쓰는 시절에 공직생활을 했다니까, 라틴어로 잘먹고 잘 산 사람이지요. 우리나라 조선 시대 양반들처럼. 그는 40대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조상이 물려준 몽테뉴 성에 살면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 말로 ‘Les Essais’를 완성 시키고, 책 이름도 ‘계량하다·음미하다·시도하다’ 이런 의미를 가진 라틴어 exiigere를 프랑스 말로 고쳐 ‘에세essai’라 했다는 겁니다. 라틴어에서 독립한 프랑스어라니! ‘에세’는 라틴어에게 프랑스 말글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역사에 길이 남을밖에 없는, 그 시댄 노랑신문에 도배될 사건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는 데는 교양어(?)인 남의 글 라틴어보다 자기네 말인 프랑스 말글이 훨씬 정감 있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이를 계기로 말과 글을 가진 유럽의 여러 겨레들이 자기네 말글을 애써 살려 쓰게 되었다 하니, 찬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그랬지요. 조선 시대 공식 글자는 漢字였지요. 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땅의 ‘애햄들’은 <겨레의 씨알>을 버렸다는 점입니다. 세종 임금님께서 새로 글자를 만드시어 그걸 <正音정음>이라 했음에도 양반이란 것들이 백성을 천賤것 만드느라 천것 근성을 못 버렸지요. 그래서 과거시험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박지원이 썼다는 열하일기熱河日記도 죽자고 우리 말과는 다른, 정음正音을 기록할 수 없는 한자漢字로 썼지요. 만약에 일신수필馹?隨筆만이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박지원은 한국의 몽테뉴란 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으면 실학파의 우두머리라는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을.

다른 글자로 써진 글을 읽고 ‘이해했다’는 어디까지겠습니까? 그래서 ‘번역을 제대로 한다?’는 늘 말썽입니다. 말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의 이성과 지성, 감성이 퇴적된 지층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 말이며 그 말을 갈무리하는 씨가 글자입니다. 책은 말씨를 갈무리하는 두지구요. 인간은 정서의 동물이기에 그의 말에는 감성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남의 글로는 내 품 안에서 우러나는 ‘흐느낌’을 메아리로 적을 수가 없지요.

우리가 쓰고 읽는 ‘에세이·수필’은 우리 말글의 뿌리로 피우는, 산문이 아니라, 산문의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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