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경로의존성
[기고]경로의존성
  • 경남일보
  • 승인 2022.03.0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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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수(경남교육연수원장)
 



얼마 전, 교장자격연수 체험처 답사차 서울지역 교육기관과 혁신기업 몇 곳을 둘러 본 적이 있다. 그 중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IT 관련 외국계기업을 둘러보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정된 자리도 없는 데다, 책이나 그 흔한 서류 뭉치 하나 볼 수 없었다. 그 큰 건물의 사무공간에 자리에 앉아 일하는 직원은 채 열 명도 보지 못했다.

이른바 ‘스마트 오피스’. 변화와 혁신은 내일의 과제가 아니라, 이미 진행 중임을 체감하였다.

지난해 우리 연수원은 독서토론 전문적 학습 공동체를 운영하여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은 박태웅의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지 싶다. 광화문, 경복궁이 훤히 내려보이는 외국기업의 사옥에서 이 책에서 뼈아프게 때리던 ‘경로의존성’의 교훈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회심리학에서 경로의존성이란 과거의 관습이나 제도, 법률, 문화가 비효율적임을 알아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여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경향성을 말한다.

오래 전, 영국에서는 자칫 행인이 오른손잡이 마부의 채찍을 맞을 우려가 있어 마차를 왼쪽을 다니게 했다는 것. 하지만, 수동기어를 조작하기 쉽게 오른쪽에 두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자동차의 왼쪽 통행을 고집한 영국이나 영연방, 일본 등은 지금까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디 자동차만이겠는가. 일본은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금도 대면결재와 인장날인 문화의 뿌리가 깊어 재택근무나 전자정부는 언감생심이다. 인장을 사용하는 문화적 경향성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기술로 인장을 대신 찍는 로봇을 만들었다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그 잘나가던 일본산 TV가 국내용으로 전락한 데는 지역마다 다른 전압과 주파수에 대한 거시적 흐름을 놓친 것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한 달에 한 번쯤 교정에 전교생을 모아 놓고 조례를 했다. 더운 날 체력이 약한 학생은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훈시와 학생부장의 지도가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이, 오랜 동안 우리 학교의 관행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교육현장의 자발적 노력과 성찰이 이어져 이제 운동장 전체조례는 역사관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대다수의 학교에는 일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한 조례대가 흉물처럼 버티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기증자가 있거나 내용연한이 남았고, 철거비용이 만만찮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조례대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다.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에게는 장애물일 뿐인 조례대, 어떤 학교는 학교 현관의 출입구를 떡하니 막아선 조례대를 보자면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런 점에서 조례대를 독서공간 겸 놀이터로 탈바꿈시킨 학교 공동체에게 박수를 보낸다.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으면, 한순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냉혹한 세상이 바로 우리 곁에 와있는 듯하다.

현상의 복제, 경로의존성을 떨치려는 공동체의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허인수(경남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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