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2)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2)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3.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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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조금씩 흘러간다.’ 러시아 시인 에세닌의 말처럼 세상은 흘러갑니다. 지구가 우주라는 바다에 흘러가는 하나의 섬일진대, 이 땅에 붙어사는 것들은 비록 돌이라 하더라도 흘러갑니다. 에세닌은 ‘고요한 행복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지만,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게 세상은 지금도 조금씩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지구가 아닌 어느 다른 별에 가 있게 된다고 믿고 있지요. 신라 시대 월명사 할배도 먼저 가는 누이에게 애가 타서 일렀으니. 길 닦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나자고. 가난한 우물에 갇혀 사는 고달픈 사람들, 그곳이 여기와는 다른 ‘고요한 행복이 있는 곳’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온갖 ‘이름씨’도 그렇습니다. 몽테뉴의 에세가 흘러 잉글랜드에 가서 에세이가 되고, 시간이 200년이나 흐른 뒤에 ‘엘리아 에세이(Essays of Elia)’가 나타납니다. (엘리아는 이 에세이 집을 낸 ‘찰스 램 (charles Lamb 1775-1834)’의 필명입니다.)

‘Essays of Elia’는 램이 1820년부터 ‘런던 매거진’에 실은 글을 모아 1823년에 1집, 1833년에 2집을 냈는데, 배울 대로 배우고 잘 먹고 잘 살았던 몽테뉴나 베이컨과는 달리 찰스 램은 가슴 아프게 외롭고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가고 한 100년 흘러 일본에 와서 동경대학의 교재로 ‘엘리아 에세이’가 채택되었다니!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지나 봅니다.

이 땅에서 글꽃 짓는 힘없는 이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나는 생각합니다. 글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 다시 살아날지 그걸 모를 뿐이다. 아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 히포크라테스도 생명이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날 그대와 만나지기를 기원하면서.

그 당시 ‘Essays of Elia’를 만난 일본 사람들은 김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울고 빨리 일어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몽테뉴도 베이컨도 아닌 왜 찰스 램이었을까? 아마도 저들 입맛에 ‘엘리아 에세이’가 쫙 올라붙었으니까 그랬지 싶은데, 그건 이성이기보다 감성의 문제였을 거라 여깁니다. 바람은 언제나 감성의 것이지요. 엘리아의 바람은 이 땅에도 그대로 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야윈 강아지 쳐다 봐줘도 서럽다는, 나라 잃고 마음 둘 데 없던 우리 어른들, 그 섧운 삶이 ’니 내 이야기 들어보라고’ 그랬지 싶습니다.

엘리아는 큰 것보다는 작고 가늘고, 먼데 있는 것보다는 옆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들여다보았으며, 남말 하기 보다는 내가 겪은 자잘한 것들로 우스꽝스러운 물결에 페이소스가 잔잔히 흐르는, 그의 글 안에는 약한 자의 슬픔 같은 그런 게 있습니다. 눈 감으면 입에 고이는 맛이 있는, 인생의 글맛이라는 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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