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4)보는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4)보는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4.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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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십니까? 너와 내가 땅에 금을 긋고 담을 쌓고 어떤 돌덩이를 금덩이로 만들고, 그러면서 죽어도 못 나수는 가슴앓이 병이 인간들에게 생겼다 합니다. 서로 거머쥐겠다고 시끄러웠던 2022년 삼월이 이 땅에서도 저물었습니다.

찰스 램의 <제야(除夜)>를 들여다봅니다. 하루, 한 달, 한 철, 한 해가 다하는 날 밤에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 지난날 나와 함께 했던 것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후회도 원망도 없이 고단도 고뇌로웠던 일들을 사랑할 수 있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찰스 램이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욕망은 앞날의 것이요 사랑은 지난날의 것이니.

“(…)이 세상 모든 소리 중에-종소리야말로 하늘나라에 제일 가까운 음악이지만-가장 엄숙하고 감동적인 종소리는 묵은해를 울려 보내는 종소리다. 나는 그 종소리를 들을 적마다 지난 열두 달 동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모든 영상들, 즉 지난날에 내가 했던 일들, 괴로워했던 일들, 이루어놓은 일들, 내던져놓았던 일들을 후회 어린 시간 속에 한데 그러모으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죽고 난 후에야 그 사람의 가치를 알아차리듯이, 나는 이제야 한 해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다. 해가 간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어느 시인이 “나는 가는 해의 치맛자락을 보았네.”라고 읊은 것이 단지 그의 환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저 숙연한 이별을 앞에 두고 우리 누구나가 느끼게 되는, 엄숙한 비애에 잠기는 감정이다. 나는 분명 어젯밤에 그것을 느꼈고, 모든 사람들도 지난밤에는 나와 같은 감정일 것이다. 내 친구를 가운데 몇몇은 영영 사라져버린 지난해를 아쉬워하기보다는 찾아오는 새해의 탄생을 유쾌하게 맞이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찾아오는 해를 반겨 맞고, 떠나는 손을 재촉해 보낸다.”는 그런 사람들하고는 맞지 않는다.

(…)나는 옛 원수를 용서하고 마음속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한다. 노름꾼들의 말을 빌자면 내가 한때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렀던 사랑의 도박을 그저 재미로 한 번 해보는 것이다. 내 생전 불행했던 사건들이나 일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이제 와서 고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잘 꾸며진 소설 속의 사건들처럼 그런 것들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보면 그토록 열정을 다해 바친 사랑의 모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앨리슨 W-n3의 아름다운 머릿결과 더욱 예쁜 두 눈에 푹 빠져 내 인생의 7년간의 황금기를 비탄 어린 연모로 보낸 편이 더 좋았다. 우리 가족은 저 도넬 늙은이한테 속아서 유산을 빼앗겼지만, 그편이 은행에 2천 파운드를 저금해 놓고, 그 넉살 좋은 늙은 악당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보다 더 낫다.

남자답지 못하게 젊은 날의 회상에 빠져버리는 것이 나의 약점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온 지금, 한 남자가 자기애라는 빈축을 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애정으로 돌이켜본다고 하면 그저 억지소리일까?(…)”

내 이름 내가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이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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