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5)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5)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4.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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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학.’ 한국 문학사에는 이런 용어가 있습니다. 동양의 양반 문화권에서 서구의 평등문화권으로 옮아가는 시대에 있었던 문학의 변태 상황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이 땅에 신문학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를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선생은 ‘酒緣·學緣’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소년 시대에 탐독하였던 梁啓超(양계초:청(淸)말기 듕귁의 사상가, 정치가)의 飮氷室文集(음빙실문집)의 영향. 양 씨의 그 저서는 그가 戊戌政變(무술정변:1898년) 후 일본에 망명하여 있는 동안 그곳에서 간접적으로 배우고 견문한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 특히 그 계몽사조를 소개·주장한 것인데 나는 그 책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비로소 盧梭(루우소오)니 康德(칸트)이니 孟德斯鳩(몽테스큐)니, 林肯(링컨)이니 하는 이들의 名字(명자)와 사상의 일단(一端)을 알았으니 말하자면 이 책을 통하여 나에게 전파된 서구의 계몽사상은 서구-일본-중국-조선, 이러한 우회적인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나의 취미를 한문학과 수학으로부터 돌연히 서구의 문학으로 옮기게 한 機緣은 내가 동경 가서 맨 처음 어느 야시장 책사에서 우연히 사다가 읽은 生田 某의 ‘근대사상 十六講’과 廚川 白村의 ‘근대문학 十講’이었다고 기억한다. 전자에는 開卷 벽두 Renaissance와 Humaniam의 장이 있는데, 무슨 월터 페이터인가의 말 ‘르네쌍스는 잃었던 자아의 재발견’이니, 또는 저자의 해설-Humanism이란 Hebrism의 ‘神’과 ‘靈’, Hellenism의 ‘사람’과 ‘肉’의 代替니, 또는 무슨 ‘靈·肉일치’의 ‘제三帝國’이니, 입센의 ‘All or Nothing’이니, 운운하는 기상천외의 신기한 ‘새 문자’ · ‘새 사상’들이 완전히 나의 눈과 머리를 현란케 하였다. 더구나 후자-곧 廚川의 ‘근대문학’은 내게는 아주 별천지요 요지경· 만화경이었다. 거기서 나는 전기 ‘영·육’ · ‘사람·신’의 대체·갈등 외에 또 무슨 ‘자연주의’의 ‘獸性 해부’가 어떻고, ‘환경milieu묘사’가 어떻고, 쌤볼리즘의 ‘고급상징’이 어떻고 ‘五官交叉’가 어떻고, 나아가 Neo·Romanticism의 새 경향은 어떻고, 또 무슨 ‘악마파’니 ‘퇴폐파’니 내지 톨스토이·도스또엡스키·졸라·발작·베를렌느·보오들레르·와일드·구르몽… 등등 별의별 사람들의 이름과 流派와 사상과 주장과 작품의 내용 소개에 접하여, 글자대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황홀한 지경에 빠졌다. 나는 허다한 사조도 사조려니와 우선 새 문자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

“요컨대 서구문학의 신입생인 다감한 이 청년은 서구문학 중에도 주로 세기말적인 퇴폐사상과 탐미주의-곧 예술지상주의에 감염되었던 것이다. 이 영향은 내가 뒤에 톨스토이와 투루게넵 등 러시아 문학의 인생파·사회파의 작품에 관심과 흥미를 돌리기까지 몇 해 동안 지속되었다.”

처음엔 새 문자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문예사조(文藝思潮)도 흘러온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먼저 퇴폐 사상과 탐미주의에 빠졌고, 인생과 사회를 다룬 작품에 눈을 돌리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합니다. 이 혼돈과 혼란의 틈바구니에 隨筆도 끼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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