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이인좌의 난’과 간장게장
[경일춘추]‘이인좌의 난’과 간장게장
  • 경남일보
  • 승인 2022.04.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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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박미영

 

“인삼은 전하께 독이 되오니 거두어 주옵소서!”

연잉군은 막무가내였다. 어의(御醫)들이 안절부절 읍소했지만 오히려 어의들을 꾸짖어가며 인삼부자탕을 연거푸 세 번이나 올렸다. 애당초 연잉군이 이복 형 경종임금께 간장게장과 생감을 올린 것이 사달이었다. 게와 감은 서로 상극이다. 실제 과학적으로도 감의 탄닌 성분이 게의 단백질 소화흡수를 방해해 소화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은 밤에 가슴과 배가 비틀리듯이 아팠다. 머리가 아팠고 고열이 났으며 설사까지 나 사경을 헤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인삼부자탕을 고집했다. 의심을 받을 만도 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닷새 만에 승하하였고 무수리 최씨가 낳은 연잉군이 왕위를 잇는다. 영조다.

“경종 임금이 흉계에 의해 게장을 드시고 급히 서거하셨음을 통탄한다!”

장안에 벽서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인좌 정희량 등이 주도했다. 백정 노비 승려들까지 인구의 절반이 가담했다. 그러나 이 미완의 혁명은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반란을 지지했던 남명학파의 진주는 반역향으로 낙인이 찍힌다.

광해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던 진주의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실각했고,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중앙 진출이 막혀 버린다.

조선 전기 진주권의 문과 급제자 241명이 후기에 들어서는 144명으로 백 명 가량이나 준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동이 180명에서 446명으로 대폭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역차별은 조선조 내내 계속됐다.

이인좌의 난 이후 남명학파는 초토화됐다. 사건에 연루된 선비들은 처형되었고 역모의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한 이들까지 색출하여 처벌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집권세력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사대부 중 재력을 갖춘 자들은 아예 벼슬을 등진 채 풍류로 시간을 보냈다. 집권세력의 표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 진주의 교방문화는 이렇듯 파란중첩의 역사를 배경으로 발달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진주에서는 임금이 드시고 승하하신 간장게장을 금기시했다. 오히려 산 게를 된장에 박아 된장게장을 담았다. 진주에 전래되어온 된장게장을 담는 풍속에는 진주가 걸어온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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