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죽순
[경일춘추]죽순
  • 경남일보
  • 승인 2022.04.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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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이덕대


오일장에서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노랗게 삶은 죽순을 팔고 있다. 죽순을 보면 가난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온 산이 푸름으로 덮이고 열무마저 미처 자라지 않은 이때쯤이면 산나물도 밭 나물도 마땅하지 않아 대밭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들이 귀한 나물이었다. 예전엔 대나무가 고가다보니 튼실한 그것들을 나물로 캐어 먹지 못했다. 죽순이 대나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오늘과 내일이 같은 날들이라는 것은 죽순과 대나무를 보면 안다. 오늘의 죽순이 내일의 대나무다. 지금이야 플라스틱에 역할을 내주었지만 그전에는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이 많았다. 집을 지을 때 지붕 받침대는 물론 울타리나 평상을 만드는 데도 대나무는 요긴했다. 다양한 용도의 대나무가 귀하고 비싼 만큼 죽순을 나물로 만들어 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대밭 경계에 있거나 대밭을 벗어난 곳에서 간신히 터를 잡고 있는 것들을 캐어 나물로 먹었다. 오랜만의 고향걸음에 조그만 밭떼기를 침범한 대나무들을 베어내고 죽순도 뽑아 정리했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머위가 자라고 감나무가 심겨진 밭에 어두울 만치 그늘을 만드는 대숲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다.

햇볕 한 조각 들지 않을 것 같은 어둑한 대밭에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풀들은 자라고 순들은 가지를 뻗긴 한다. 염소가 좋아하는 사위질빵이나 국수나무 같은 덩굴성 식물이 먼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민다. 아침저녁으로 내린 이슬도 촘촘한 댓잎을 통과하여 시나브로 대밭을 적시고 땅에 떨어진 마른 댓잎에 물기가 스미게 한다. 이때쯤이면 하늘을 향해 무섭게 솟아오를 죽순이 땅을 박차고 삶을 시작한다. 흙색을 띤 죽순은 미래에 살아남기 위한 절묘한 위장을 하고 있다가 솟구친다. 푸른 대나무의 시작이다.

어린 죽순이 마디와 마디 사이에 공간을 비워둔 채 순식간에 커가는 것은 자신을 먹이로 삼는 뭇 짐승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절박감, 찬란한 햇빛의 시간과 때를 놓칠 수 없는 생존본능은 압도적이다. 꼿꼿하게 하늘을 향하는 죽순에는 바람이 걸쳐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대나무의 최고 봄날은 두텁고 알록달록한 껍질로 무장한 채 땅을 박차고 오르는 죽순의 시기다. 플라스틱 범람으로 별 쓰임새 없는 나무가 되었지만 요즘도 죽순을 꺾는 마음은 불편하다. 당장의 맛있는 나물도 좋지만 청신한 바람과 그늘을 만들어내며 하늘로 치솟는 대나무가 주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삶은 죽순을 보니 뜬금없이 미래를 뺏어 현재를 채우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대가 살아갈 미래도 현재만큼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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