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7)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17)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5.0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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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 ‘문학의 논문’이라는 개념이 ‘에세이·수필’을 학(學)의 변두리쯤 개념으로, 예(藝)와는 사돈에 8촌쯤으로 여기게 한 것 같아요. 예(藝)와 학(學)은 엄연히 다른 건데,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어서 이제에도 수필의 영역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저널리즘 탓일 겁니다.

1924년 영대靈臺 창간호에 ‘수필’이란 이름으로 실렸다는 이광수 선생의 글 ‘인생의 향기’를 한 자락 톺아봅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한다. 쓴 바다, 고생 바다, 노고의 바다, 고난의 바다라는 뜻이다. 어떤 팔자 좋은 사람에게는 이 인생이 낙원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수인에게는 인생은 고해다. 나는 인생을 고해로 보지 아니치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낙지(落地) 이래로 일찍 행운이란 것을 보지 못한 불행아(不幸兒)여니와 지금도 불행한 사람이다. 빈궁, 불건강, 세상의 핍박, 사업의 실패, 민족적 고민, 나 자신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불만족, 모두 불행거리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지고 죽고 싶게 괴롭다. ‘아아, 인생은 고해로구나!’하고 장태식(長太息)을 아니 할 수가 없다. 만일 미래도 과거와 같을 줄을 전지(前知)한다 하면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신은 나 같은 인생이 자살하여버릴 것이 두려워서 여러 가지 예방책을 쓴다. 첫째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 하는 희망을 나 같은 인생의 정신 속에 심어둠이다. 이것은 진실로 생명수다. 이것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내일이나 내일이나 하고 상한 하트와 피곤한 다리를 끌고 허덕허덕 수없는 생의 고지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느냐? 곧 죽어서 이 고해를 벗어나지 아니하느냐? 이 인생에 무슨 잊지 못할 미련이 있어서 상한 하트와 피곤한 다리를 끌고 허덕거리고 수없는 고개를 넘느냐.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인제는 ‘내일의 희망’에 속아 살지는 아니하련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 고해하는 인생에도 맛 들일 데가 있는 까닭이다.(…)

인생을 암흑이라 하면 사랑은 유일한 광명이다. 인생을 빙(氷)세계라 하면 사랑은 유일한 난기(暖氣)다. 인생을 악취라 하면 사랑은 유일한 향기다. 그런데 이 정 떨어질만 한 인생에도 아직 사랑은 멸하지 아니하였다. 이 험악한 이기주의 세대에도 인형(人形)을 쓴 사람치고는 그 영혼의 어느 구석에 애(愛)의 일편을 장(藏)하지 아니한 자는 없다. 그것이 추악한 쟁투와 시기와 살육의 인생에 유성 모양으로 간간이 섬광을 발한다. 이것 때문에 나는 이 고해의 인생을 허덕거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어느 시각에나 이것까지 인생에서 소멸 되는 때가 있다 하면 나도 그 즉시에 땅바닥에 엎디어 죽어버릴 것이다.(…)”

사람은 다 사랑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어떤 고난과 고통과 고뇌도 견디게 한다.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죽는 게 낫다. 이제에 사는 나는 옛사람보다 잘난 거 같은데 ‘인생의 향기’는 한 백 년 흘렀어도 다를 바가 없으니, ‘내 인생에 사랑이여! 불쌍한 현대인이여!’ 장태식이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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