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0)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0)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5.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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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에서 램까지 240년이 흘렀고, 이광수 선생이 이 땅에 에세이를 소개했다는 1922년을 눈금에 놓으면, 또 백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에세이가 저쪽 나라에서는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 속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따에 들어온 에세이·수필을 갈래지어 보는 학업이 진행됩니다. 몽테뉴 형, 베이컨 형, 찰스 램 형 하면서, 정통을 가린다고 동네가 시끌거렸습니다.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소월의 산유화처럼 지은이가 뒤로 빠져있는 건 베이컨 형, ‘내’가 주인이 되는 글은 몽테뉴 형, 거기서 더 사사로워졌다 싶으면 찰스 램 형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이 땅에 김진섭 형, 이양하 형, 피천득 형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분들의 에세이·수필에 나타난 성향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는 한편 후진에게 끼친 글꽃 솜씨를 갈래지어 그렇게 부른 건데요, 성향이 대충 그래 보인다는 거지, 이른바 문하라 하더라도 빼닮은 글은 드물기 마련입니다. 한 배 새끼도 아롱이다롱이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꼭 같은 건 없다고 봐야지요. 게다가 말꽃 아닙니까.

산다는 게 철학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진섭 선생의 에세이 “생활인의 철학”을 들여다봅니다.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하면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 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하고, 관외에 은둔하고 고일(高逸)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하여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하여 주는 현철한 일군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우리들이 생활권 내에서 취하게 되는 모든 행동의 근저에서 일반적으로 미학적 내지, 윤리적 가치 의식이 횡재(橫在)하여 있는 것이니, 생활인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어느 종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위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상이 각인의 행동과 운명의 척도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상이란 요컨대 그 사람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일반적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온 규범의 한 파생체(派生體)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좋은 경구는 한 권의 담론서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를 전승하는 현철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 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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