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2]최대 격전지
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2]최대 격전지
  • 임명진
  • 승인 2022.06.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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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은 1598년 2월부터 본격적인 사로병진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새로운 부대가 증원되고 8월이 되자 각각의 거점 목표를 향해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사천선진리왜성(이하 사천왜성) 공격을 맡은 중로군은 요동으로 갑자기 급파된 이여매 장군을 대신해 동일원 제독이 새로 지휘를 맡았다. 명군은 동 제독을 위시해 모국기, 섭방영 등을 비롯한 2만 7000여 명, 조선군은 정기룡 장군이 지휘하는 2200여 명이 투입됐다.
[1] 7년 전쟁 최후의 작전, 사로병진
[2] 최대 격전지, 사천 선진리왜성
[3] 순천왜성과 이순신 장군
[4] 왜성에서 공원으로
[5] 전문가 인터뷰


당시 일본군은 제1차 울산성 전투가 끝난 직후 약 600㎞에 걸쳐 있는 기나긴 남해안 방어선 유지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이를 축소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조선 남부의 안정적인 확보를 바랬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불허하면서 사로병진의 목표 거점인 순천왜성은 제1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울산왜성에는 제2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사천왜성은 제4 선봉장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둔하며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천왜성을 점령하라

중로군은 서울에서 청주, 상주, 합천 등지를 거쳐 9월 20일 진주 공략에 나섰다. 일본군은 2차 진주성 전투 직후 진주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남강 건너편, 지금의 봉수대가 있는 지점에 망진채를 세우고 주둔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9월25일 정미 17번째 기사 중

‘동 제독이 지난 20일에 진주로 진격하니 적군이 우마와 기계 따위를 모두 버리고 곤양과 사천 방면으로 도망갔는데 단지 7급을 참하였으며 사로잡혔던 400여 명을 쇄환하고 한편으로 진주로 들어가서 지키고 한편은 적을 추격한다고 하였습니다’


진주를 탈환한 조·명연합군은 남강을 건너 28일 사천읍성을 공격했다. 정기룡 장군이 앞장서 적 80여 명을 척살하자 나머지는 본대가 주둔하고 있던 사천왜성으로 달아났다. 일본군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1만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와 사천 일대에 망진채와 곤양채, 영춘채 등 작은 성채를 촘촘히 쌓아 유사시 첨병 역할과 함께 서로 구원하게 했다.

왜성은 자체 방어력이 매우 견고했다. 조선의 성과는 달리 성곽이 최하 3겹에서 미로처럼 형성돼 있어 한번에 공격하기 어려운 구조다. 울산왜성이 조명연합군의 거듭된 공격에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했다.

의병장 곽재우도 “울산왜성은 끊어진 산을 이용해 성을 쌓으니 매우 교묘해서 평지 가운데 생긴 한 개의 산성이며 외성의 둘레가 600여 발에 불과하므로 정병 2000명이면 넉넉히 지킬수 있다”고 평가했다.

구릉지대에 위치한 사천왜성은 전형적인 왜성의 입지조건을 갖췄다. 지금의 사천읍에 있는 읍성과 이어지는 육로 부분을 제외하고는 3면이 모두 바다로 연결돼 항구에는 배들이 정박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사천왜성의 중심 규모는 동서로 500미터, 남북으로 500미터의 크기로 추정된다. 성의 가장 높은 부지에는 3층 높이의 ‘천수대’라 불리는 지휘소가 있었는데 왜성으로 접근하는 조명연합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천왜성은 특이하게도 외곽에 고려시대 때 흔적인 토성을 가지고 있다. 토성은 바닷물을 끌여들인 해자와 함께 길다란 외곽 방어선을 형성했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사천왜성이 있던 자리는 고려시대부터 조세를 저장하는 12조창의 하나로, 조선의 성을 재이용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구축된 다른 왜성과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선진리성 성벽 일부

◇장기전이냐, 속도전이냐

조·명연합군의 계속된 공세에도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성 밖에서의 전면전을 피했다. 사천왜성에 당도한 조명연합군 지휘부는 공세 시점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일단 포위는 했지만 명의 유격대장 모국기는 “혹여나 구원에 나설 수 있는 고성 등지에 산개한 일본군부터 완전히 제압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의 정기룡 장군도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장기전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같은 신중론이 나온 배경은 1차 울산성 전투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왜성은 한번에 깨트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공격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동 제독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상훈 육군박물관 부관장은 “사천왜성까지 너무 빨리 진격을 했기 때문에 일단 부대를 한번 정비하자는 신중론이 제기됐지만 동 제독은 지금까지 쾌속 진격을 했기에 밀어부쳐 보자고 더 속도를 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10월 1일 오전, 날이 밝아오자 성을 포위한 조·명연합군은 일제히 총공격을 시작했다. 명군의 유격장 모국기, 팽신고, 섭방영이 성의 정면을 공격하고, 유격장 학삼빙, 사도립이 오른쪽을, 유격장 마정문, 남방위가 성의 왼쪽을 맡았다.

팽신고의 부대는 대포를 쏘며 아군을 엄호했다. 조·명연합군이 해자를 넘어 성안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일본군도 조총과 활을 쏘며 응사했다.

◇전투 도중 예기치 못한 화약고 폭발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조금씩 조·명연합군이 성 내부로 진입하려던 차에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대포를 쏘던 팽신고의 진중에서 갑자기 엄청난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큰 소음과 함께 순식간에 불길과 연기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후방에서의 갑작스런 상황에 선봉에서 공격하던 조·명연합군은 영문을 몰라 혼란에 빠졌다.

조·명연합군의 공세가 주춤거리자 일본군이 기회로 여겨 성문을 열고 일제히 반격에 나왔다. 급작스런 상황 전개에 가장 먼저 화약고가 폭발한 팽신고 부대가 도주하기 시작했다. 성의 좌우에서 공격하던 학삼빙과 마정문의 기병도 이를 보고 후퇴를 하게 되니 보병과 기병이 한데 섞이는 상황마저 발생했다. 유격장 모국기가 섭방영 등과 함께 혼란에 빠진 부대를 수습해 싸우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정경세 경상도관찰사가 조정에 보낸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동일원 제독이 신채의 적을 공격했는데, 성문을 부수고 바야흐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진중에서 화약에 실수로 불이 번져 폭발해 어지러우니 왜적이 이것을 바라보고는 성문을 열고 튀어나와 방포했다. 명군이 달아나다 죽은 자가 거의 7000여 명이나 되었고, 군량 2000여 석도 불태워 없애지 못하고 도망했다. 전사자가 들에 가득차고 무기가 130리 땅에 낭자했다. 동 제독은 성주까지 후퇴해 재차 공격하려 했으나 군사들은 한개의 무기도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다’


전투 도중 발생한 화약고 폭발은 숙련되지 못한 군사의 실책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를 재빨리 수습해야 할 동 제독은 상황판단 능력과 소통 측면에서 큰 문제를 드러냈다.

이 부관장은 “진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대포를 많이 가져갔다는 말이 된다. 왜성 공격에 대포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보이는데 왜성까지 워낙 빨리 진격하다 보니 화약 관리상의 정비나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동 제독은 그런 상황에서 유격장 모국기가 부대를 수습해 다시 결전하자고 건의했지만 묵살했다. 더욱이 조·명연합군은 사천왜성까지 진격할 당시에 점령한 망진채, 영춘채 등의 거점 진지를 모두 파괴해 버리는 우를 범했다.

이효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후방에 거점을 남겨놓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본군은 그걸 보고 잘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전투의 결과, 명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컸다.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반년 넘게 어렵게 준비한 병장기와 군량미가 모두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명군이 조선에서의 7년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전투로 벽제관 전투와 함께 사천왜성 전투가 꼽힌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천읍성 성벽.
 


이상훈 육군박물관 부관장 ‘적장 시마즈 가문과 조선의 악연’

이상훈 육군박물관 부관장은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해 “일본에서는 무장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규슈 지역에 기반을 둔 시마즈 가문은 조선과는 악연이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근거지로 지금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세력을 배출한 곳이다. 일본에서 시마즈 가문의 군대는 강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은 했지만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를 거쳐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 부관장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조선 침략 당시 일본군이 물자를 공출하는 담당구역으로 가장 중요한 경상도 지역을 담당했는데 의병과 조선군의 항전으로 별다른 두각은 나타내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노량해전에서 간신히 탈출해 일본에 돌아가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다가 적진으로 돌격하는 탈출을 감행한 것은 유명하다.

이 부관장은 “이 적진 돌파 탈출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겨 결과적으로 시마즈 가문이 살아남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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