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3]순천왜성
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3]순천왜성
  • 임명진
  • 승인 2022.06.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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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우리 군대의 화약에 불이 나서 불을 피하느라 분주하던 순간에 왜적들이 즉시 연기 속으로 갑자기 돌격해와 한동안 혼전하여 피차간에 모두 손상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퇴하여 군대를 휴식시키고 다시 공격을 도모하려 합니다’ -선조실록 31년 10월



<목차>

[1] 7년 전쟁 최후의 작전, 사로병진

[2] 최대 격전지, 사천 선진리왜성

[3] 순천왜성과 이순신 장군

[4] 왜성에서 공원으로

[5] 전문가 인터뷰

 
일제강점기 당시 사천 선진리왜성 천수대 자료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선진리 왜성 안에 세워져 있는 공군 충령비. 이 자리가 성내 가장 높은 곳으로 천수각 자리다.
◇사로병진 작전의 도미노 실패로 이어져

중로군 사령관인 동일원 제독이 전투 직후 조선 조정에 다시 공격하겠다는 보고를 올리자,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사천의 패전에서 제독의 군사가 반 이상 죽고 군량과 무기가 모두 왜적의 손에 들어갔으며 제독은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는데 지금 피차간 모두 손상이 있었다고 하니 허세만 부리고 과장하는 습성을 여기에서 볼수 있다’ 며 강력 비판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사천 선진리왜성전투(이하 사천왜성)의 결과는 조선 조정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참담한 패배에 낙심한 선조는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 피해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지만 정기룡 장군의 통솔 하에 조선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철수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뛰어난 지휘관, 군사들의 사기, 강력한 무기, 그리고 보급을 꼽을 수 있다. 여러 정황을 비춰 보면 사천왜성 전투는 지휘관의 역량 부족이 직접적 패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동 제독은 부대를 정비해 시간을 갖자는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했고, 현장에서의 초기 혼란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다시 부대를 모아 결전하자는 휘하 장수들의 건의도 묵살하고 사천에서 진주, 합천을 지나 경북 성주까지 후퇴했다.

참패의 여파는 실로 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10월 12일 갑자 5번째 기사에는 우의정 이덕형이 순천왜성 전투에 관한 상소를 올리며, ‘순천왜성 공격에 나선 명의 유정 제독이 사천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를 결정한 일’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천왜성의 패배는 순천왜성 공격에 나선 서로군과 울산성 공격을 맡은 동로군의 작전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반년이 넘는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한 사로병진 작전이 실패로 끝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중로군이 사천왜성에서 참패를 당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른 부대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순천왜성을 포위하고 있던 서로군이 철수를 하자 해상을 포위하고 있던 수로군마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초래됐다”고 말했다.



 
순천왜성 복원지. 일본은 바다와 접하고 있어 해상으로 진출입하기 쉬운 곳에 왜성을 쌓았다.
순천왜성 복원지. 가파른 성벽은 층층이 단차가 있어서 공격하기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다.


◇명은 조선에 참패 책임 떠넘겨

예상치 못한 참패에 큰 충격을 받은 명나라는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는 모양새를 취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는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신이 성주에 도착해 중국 장수가 먼저 도망친 죄를 우리나라의 군사에게 돌리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제 왕 안찰이 정기룡에게 ‘네가 어찌하여 먼저 달아났는가’라고 했다 합니다. 기룡은 먼저 성에 올라갔고 맨 뒤에 나온 자인데 도리어 이러한 누명을 받으니 몹시 해괴합니다. 기룡 한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비록 대단찮은 일인 듯 하나 이로 인하여 혹 터무니 없는 말로 이보다 더 큰 사건을 조작할 것이니 매우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고 했다.

진상조사에 착수한 명나라는 가장 먼저 전장에서 도망친 마정문과 학삼빙, 두 장수를 진중에서 참수하고 주장인 동일원 제독의 관직을 강등했다. 패전의 원인은 ‘모든 병력이 출전하면서 군영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기병과 보병이 함께 공격하는데 후원군이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계획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기병이 앞서 도망하는 바람에 길을 막아 보병들을 희생시켰고, 마정문, 학삼빙이 먼저 달아나 병사들을 희생시켰으며 사도립, 시등과, 모국기, 성방영, 남방위, 팽신고, 조승훈 등이 복병을 설치하고 엄히 경계하지 못한 점도 패배의 요인이라고 했다.



 
순천왜성 복원지는 완만한 비탈을 따라 시작된다. 입구 안내간판은 한글과 일본어, 영어 3종류로 세워져 있다.
순천왜성 천수각터.


◇사천 떠난 시마즈, 부산 대신 노량으로 갔다

명나라는 이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때마침 일본내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면서 정세가 급변했다.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급부상하고 조선에 파병한 모든 일본군에게는 신속한 철수 명령이 하달됐다.

시마즈 요시히로도 11월15일까지 부산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문제는 순천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하루마사, 오무라 요시아키 등 수만 명에 달하는 주력군이 여전히 고립돼 있었다는 점이다.

고니시는 명의 군대에 뇌물을 주고 철수를 하려고 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격렬하게 반대하며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에 고니시는 주변의 일본군에게 거듭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군이 사천왜성에서 승리하면서 순천왜성을 도울 여력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는 제1차 울산성 전투 결과 일본군이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고안된 사로병진 작전이 철저하게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천왜성의 공격이 성공했더라면 시마즈의 부대가 순천왜성으로 향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순신 장군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게 된다. 고니시의 요청에 사천과 남해, 고성 등지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순천왜성으로 결집하게 된다.



 
순천왜성 주차장에 세워진 돌간판. 순천왜성의 옛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선조실록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17일부터 사천에서 철수해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다치바나와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사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군대와 함께 300여 척의 대함대를 꾸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노량에서 일본군 함대를 맞아 18일부터 다음날인 19일까지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시마즈의 부대는 노량에서 궤멸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부산으로 후퇴한 일본군은 27일 일본으로 모두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는 입었지만 철수라는 전략적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철수를 가능하게 한 사천왜성 전투를 벽제관 전투, 1차 울산성 전투와 함께 자기들의 대표적인 3대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위원은 “만약 사천왜성에서 승리했다면 사로병진 작전 전체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순천왜성의 고니시도 고립된 채로 조·명연합군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참패로 끝나면서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순신리더십센터 이순신체험관에 전시된 이순신 유적들.
창원시 진해구 충장로에 위치한 이순신리더십센터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사천왜성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의 활약



제장명 소장은 “사로병진 작전은 사실상 명군이 주도했으나 조선군도 나름의 역할을 했다”면서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은 선두에서 전투에 임했고, 휘하 군사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등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평가했다.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은 비록 명군에 비해 병력수는 적었지만 보급 지원과 함께 길을 안내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등의 여러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봤다.

명나라가 패전의 책임을 정기룡 장군에 돌린 것에 대해서는, “당시 명나라 군은 전투에 패하면 책임을 조선군에게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며 “가장 먼저 조선에 파병돼 평양성 탈환 작전을 벌이다 실패한 명의 장수, 조승훈도 조선이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다며 조선군 탓으로 책임을 돌렸다”고 했다.

제 소장은 “정기룡 장군은 곤양채, 망진채, 영춘채, 사천읍성을 칠 때 선봉에서 활약했다. 사천왜성 전투에서도 정기룡 장군은 성안에 우물이 없다며 포위전을 벌여 장기전을 가야 승산이 있다고 제안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사천왜성 참패의 직접적인 원인은 동일원 제독의 무리한 작전과 통솔력에 있다고 보았다.

제 소장은 “동 제독은 왜성 공략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으며 휘하 장수들과의 소통에서 문제를 노출했다. 화약고 폭발과 함께 발생한 현장에서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후퇴만 하면서 참패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제장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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