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일제시대 요릿집과 진주비빔밥
[경일춘추]일제시대 요릿집과 진주비빔밥
  • 경남일보
  • 승인 2022.06.2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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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박미영 이사장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아(官衙)가 폐지되자 진주비빔밥은 중앙시장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제강점기, 관(官)을 벗어난 육회비빔밥이 요릿집이 아닌 시장으로 간 이유는 한일 간 식문화의 차이 때문이었다. 젓가락을 이용해 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일본인들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뒤집어 비비는 조선의 문화는 수용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1200년간이나 이어온 일본의 육식금지 문화도 한몫했다. 일본이 육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72년 메이지 일황이 육식금지령을 철폐한 이후부터이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근대사상이나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식육이었다. 체격이 큰 서양인들을 본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 차원에서 육식을 권장했다. 도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규나베(소고기전골)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고기를 먹을 정도의 형편이 될 정도로 수입이 없었다. 육식문화와 오랫동안 단절되어 먹는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의 고기 요리들은 규나베 외에는 독자적인 레시피를 가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각종 나물에 들어가는 마늘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조롱을 했다. 그들은 조선인을 향해 “닌니쿠쿠사이(ニンニクくさ-い. 마늘 냄새 더럽다)”라며 깔보았다. ‘닌니쿠쿠사이’는 조선인을 상징하는 욕이었다.

한편 상봉동에는 유력인사의 첩실이었던 노기(老妓)들이 운영하는 비빔밥집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랬는지 대부분 외상제였다. ‘난희집’, ‘난심이집’, ‘송자집’ 등 기생의 이름을 딴 상호를 내걸었다. 가장 장사가 잘돼 매상을 많이 올린 곳은 육회와 단배추 나물이 들어간 난희집이었다. 속이 꽉 찬 결구배추는 일제강점기에 전래된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얼갈이 배추인 단배추였다. 단배추는 진주의 특산물이었다. 연하고 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최영년(1856∼1935)이 쓴 ‘해동죽지’에 ‘옥화(玉河)숭’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표고버섯은 자연건조 시키는 것이 원칙이다. 숙주나물은 대가리를 떼고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인 흰빛으로 넣는다. 죽순과 고사리는 반드시 삶아서 말린다. 약간의 독소가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고 실제는 영양소 차이가 세 배나 되기 때문이다. 전통 그대로의 재료 손질과 맛의 표준화를 통해 진주비빔밥의 명성을 회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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