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4]왜성에서 공원으로
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4]왜성에서 공원으로
  • 임명진
  • 승인 2022.06.2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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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선진리왜성(이하 사천왜성)의 입구에는 3개의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차례로 건립된 이 기념비들은 사천왜성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첫번째 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것으로 자신들의 사천왜성 전투 승리를 고적 81호로 지정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두 번째는 해방 이후인 1963년 사천왜성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 승리를 기록한 사적 50호 기념비다. 마지막 기념비는 1990년대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일본이 세운 고적 81호를 문화재 자료 274호로 재지정 했음을 알리고 있다.



<목차>

[1] 7년 전쟁 최후의 작전, 사로병진
[2] 최대 격전지, 사천 선진리왜성
[3] 순천왜성과 이순신 장군
[4] 왜성에서 공원으로
[5] 전문가 인터뷰

 
사천왜성 입구에 세워진 3개의 비석. 사천왜성은 1997년 사적 지정이 해제되고, 1998년에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조선총독부, 선진공원 만들고 신사까지 세워

사천왜성은 1997년에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에 따라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 국내 문화재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왜성의 국가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왜성을 해당 지자체가 지방문화재로 재지정할 경우 일본이 쌓은 성이라는 점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왜성’ 명칭을 붙이도록 했다.

이에따라 남해안 일대의 왜성은 지자체 지정 문화재로서의 재지정과 명칭 변경이 차례로 이뤄졌다.

사천왜성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는 ’사천선진리성’이라는 명칭으로 고적 81호로 지정됐고 해방 후에는 사적 50호로 지정됐다. 그러다 1997년에 사적 지정이 해제되고 1998년에 문화재자료 274호 지방문화재로 재지정됐다. 이때 ‘사천선진리왜성’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그런 연유로 3개의 기념비 중 유일하게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의 승리를 기념한 기념비만 사적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인숙 문화해설사는 “국내 왜성 30여 개가 처음에는 사적으로 지적됐다가 문화재자료로 강등되는데, 치욕의 역사이다 보니 왜성을 우리 문화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선진리성은 수난을 당했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지명을 바꿨다. 군사기지를 뜻하는 선진의 ‘진’이라는 한자를 ‘진압할 진’으로 썼는데 조선총독부는 ‘나루터 진’으로 바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천읍성은 ‘산성공원’, 선진리성은 ‘선진공원’으로 공원화 하고 신사까지 세웠다.



 
사천왜성 안에 있는 사천해전 전승기념비.
사천왜성에는 봄마다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배 해설사는 “고려시대 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는데 일제는 그 이름과 의미를 바꾸고 2개의 신사를 건립했다”고 했다.

사천왜성의 공원화는 사천왜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수장,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오타 히데하루 일본 가고시마 국제대학 교수의 ‘사천왜성을 통해 본 한일관계’라는 저서에는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1917년부터 사천왜성 일대를 영구보전하기 위해 부지를 매수했으며 1918년에는 천수대 터에 사천왜성 전투를 기념한 ‘사천신채전첩지비’를 건립하고, 현재의 조명군총 자리에 당병공양비를 건립했다. 시마즈가는 매수한 성지를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는데 이후 고적으로 지정됐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일본은 고적이나 역사적 장소, 기념물을 공원으로 활용해 여론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이런 방식은 조선에도 적용됐다. 조선총독부는 사천왜성의 승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명승지로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벚꽃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다.

오늘날 벚꽃 축제로 널리 알려진 사천 선진리왜성 벚꽃축제의 기원은 이때부터다. 한때 일제가 심은 벚꽃에 유래한 축제를 개최해선 안 된다는 비판적 여론이 제기됐으나 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잠잠해졌다.



 
사천왜성 복원 성문. 일본의 당시 성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
사천왜성 복원성문을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성문 밖으로 성벽이 보여 입구가 복잡하게 꺾이는 왜성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왜성의 흔적

사천왜성은 인근의 순천왜성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왜성 중 처음으로 성문을 복원했다. 건립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히메이지 성을 본 땄다. 일본의 성문은 호랑이의 입을 뜻하는 ‘호구’라고 불린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의미다. 적들이 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성문 앞을 미로처럼 성벽을 쌓아 만들어 놓은 것이 왜성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천왜성 중심부는 ‘혼마루’와 ‘니노마루’라는 크게 2개의 권역으로 나눈다. 지휘부 역할을 하는 천수각이 있던 곳이 혼마루이고 그 혼마루를 둘러싼 성곽이 니노마루다. 니노마루는 주로 병사들이 거주했다.

당시의 구조로 보건대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하기 위해선 지금의 입구 주차장 부근에 있는 토성과 해자를 지나 사천왜성 성문에 도달하게 되며, 그걸 넘어서면 미네마루라는 성벽을 지나 혼마루까지 여러 겹의 미로 같은 방어선을 거쳐야 한다. 성 내부에는 옛 성곽의 기초석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배인숙 문화관광해설사
배 해설사는 “지금 토성과 해자가 있는 곳이 성의 동쪽이라고 보면 된다. 나머지 서남북은 지금은 간척돼 있지만 당시는 바다로 항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성 내부에는 커다란 벚꽃나무들이 곳곳에 식재돼 있다. 내부에는 여러 조형물이 설치돼 있는데, 커다란 매향비석도 눈길을 끈다. 매향비석의 존재는 사천이 과거 왜구의 침탈이 극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배 해설사는 “고려 말 국운이 기울면서 대마도와 가깝고 조세를 저장하던 사천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다. 이에 매향을 심어 침입을 막고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 그런 의식이 있었는데 특히 경남에는 사천에만 2곳에 매향비가 설치됐다”고 설명했다.

성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 있는 천수각 터는 일제가 세운 ‘사천신채전첩지비’라는 기념비가 있었지만 해방 이후 철거되고 대신 6.25 공군위령비가 우뚝 서 있다. 부근에는 또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해 승리한 사천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도 건립돼 있다.



 
복원된 성곽에는 두 종류의 돌들이 섞여 있다. 성곽 복원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상일 사천시 문화재팀장.


◇정비사업은 진행 중

사천시는 지난 2006년도부터 20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사천왜성 복원사업을 진행했다. 당시에 사용된 성벽 돌의 개수만 885개에 이른다.

복원된 성벽은 약 70도 각도로 경사가 있다. 지진이 잦은 일본이기에 붕괴를 막고 적이 쉽게 성벽을 넘을 수 없도록 고안된 일본의 독특한 축성기술이다. 하지만 복원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굳이 많은 예산을 들여 왜성을 복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제대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부실 복원을 했다는 비판도 많았다.

김상일 사천시 문화재 팀장은 “복원할 때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성문의 경우도 발굴 조사 당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정비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기초석이 발견돼 복원에 나섰다. 복원 과정에서 살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렸다”고 말했다. 사천시는 고려시대 통양창성의 흔적인 해자와 토성까지 복원해 놓았다.

김 팀장은 “고려시대의 유물인 토성을 복원한 이유는 여기가 단순히 왜성만 있었던 곳이 아니라 그 이전에 고려의 통양창성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토성까지 복원을 했다. 사천왜성은 한 장소에서 한국과 일본의 성 양식을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사천왜성 바깥쪽에 크게 흔적이 남아 있는 토성과 해자 흔적.
사천왜성 바깥쪽에 크게 흔적이 남아 있는 토성과 해자 흔적.


지금도 사천왜성 주변에는 연안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김 팀장은 “벚꽃 축제 기간에는 일 평균 2만여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왜성으로 가는 주변 도로를 정비해 벚꽃을 식재하고 야간조명을 설치하는 등 편의시설을 확충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왜성 바로 인근에는 사천왜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전사자를 모은 조명군총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조명군총은 조선군의 피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명군의 군총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조명군총에 사천시문화원은 1983년 창립과 함께 전투가 벌어진 매년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조명군총 옆에는 국내 유일하게 이총 기념비까지 만들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아픔까지 달래고 있다.

글=임명진기자, 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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