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5)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5)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6.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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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에도 연변에 이태근 씨처럼 아직도 살아 있어서 6·25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호국보훈의 달은 가슴 아픈 달입니다. 겨레의 가슴에 총질을 한 6·25. 이젠 6·25 사변도 6·25전쟁도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연필로나 끄적거리던 편지가 되었습니다. 북에서는 ‘남조선해방전쟁’이라, 그래서 이 땅에 온 인민군은 ‘해방군’이었고, 듕귁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라 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한다고 생색을 내면서, 인해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총도 없이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죽도록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만주 땅에 살던 우리 겨레를 모조리 내몰아 총알받이로 씨를 말렸지요. 그런 전쟁이 어쩌다 ‘한국전쟁’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이나 북이나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꽃처럼 지고, 이젠 일여든 나이에나 기억하고 있지요. 어릴 때부터 그 참상을 견디며 살았으니까요. 리태근 씨의 ‘어머님의 휘바람소리’에는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쏘련 홍군이 세웠다는 새하얀 비석이 어쩐지 나는 두려웠다.(…)재앙만 나면 모두들 비석거리에 모여들어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라(…)대낮에도 모두들 무서워서 비석거리를 에돌아 가는데 하필이면 어머님은 왜서 귀신이 넘나드는 언덕을 기를 쓰고 뚜졌을가. 꼬불꼬불한 앞 남산 고개길 홈채기에는 어머님이 한평생 애지중지 가꿔오는 오이밭이 있었다.(…)노란 흙이 드러난 언덕에는 밑뿌리가 꺼칠하게 타버린 허리굽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지란 별로 없는 밤나무는 몇 해 못살고 시들 것만 같았는데 목숨도 질기지 봄이면 거칠한 가지 끝에 새잎이 움튼다. 나무 밑에 앉으면 그것도 나무라고 모진 햇빛을 말려주었다. 어머님은 나무밑에 앉아서 습관처럼 휘바람을 분다. 앞이가 빠져서 바람이 새는 휘바람소리는 누가 들어도 무미건조한 소리 같지만 자꾸만 들어서야 그 노래가 한많은 농부의 인생을 호소하는 호미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동삼철리 아침해 솟는다 둥근해가 솟아오른다 에라 에라 에라 으흥으흥…호미 호미 호미를 메고 나간다….)노래를 부를 때마다 흰구름이 흘러가는 남족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끝없이 휘바람을 부는 어머님의 모습이 어쩌면 한폭의 수채화 같았다.(…)

가을이 되어 오이가 늙어서 넌출이 누렇게 되면 오이밭에는 별 볼일이 없었다. 날마다 따라가보았댔자 허리굽은 밤나무 밑에서 할 일도 없으면서 멍하고 남족하늘 어딘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어머님이 하도 이상해서 날마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가 물어보면 억석하게 웃으며 또다시 일손을 다그친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너무 심심해서 어께에다 풀잎 견장을 달고 머리에는 싸리나무 모자를 쓰고 싹나무 보총까지 받쳐들고 어머님을 깜짝 놀라게 한다고 바땃꿍, 손들었!하고 소리치며 불쑥 나타났다. 어머님은 너무 기뻐서 장하다고 손벽치며 치하해주리라 했는데 웬걸 댓바람에 내 어깨우에 달린 견장을 뜯어버리고 풀모자도 해제하며 그렇게 노여워할 줄이야.(…)웬일인가 애들마다 해방군이 되는 게 꿈이였는데 왜 한사코 반대하는 걸가? 한참이나 락담하시던 어머님이 피골이 상접한 두 눈에 또다시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나를 원망하는지 어머님 자신을 원망하는지 한참이나 나를 안고서 넉두리하시던 어머니가 또다시 멍하고 남족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는 날이면 어머님이 눈가에는 주름이 몇 개씩 더 생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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