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진주성, 불후(不朽)의 대첩성지로…
[경일춘추]진주성, 불후(不朽)의 대첩성지로…
  • 경남일보
  • 승인 2022.07.1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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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 

 

진주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이 매일 접하고 있는 진주성(晉州城)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하여 오늘 본지에서 필자는 진주인이라면 모두가 필히 알아야하는 진주성에 대한 정확한 역사와 그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상징이자 문화의 요람이다. 진주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예로부터 삼국시대에는 거열성(居列城),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 고려시대 이래로는 촉석성(矗石城) 또는 진양성(晉陽城)으로도 불려 왔다. 이 성은 고대 이래로 진주 진양의 선조들과 더불어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같이 해오면서, 이 고장에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그리고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쌓은 성으로 원래는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그 후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경상감사 김수가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외성을 쌓았으나 현재 외성은 흔적도 없이 시가지가 되었고, 지금의 복원된 성은 내성이다. 비록 상징적으로 복원됐지만 복원을 끝낸 곳은 진주성 뿐이다. 본래 성의 높이는 5∼7m, 둘레는 1760m. 전체 면적은 17만 5206㎡(5만 3000여 평)이다.

현재 진주성은 문화재 등급상으로는 사적 제118호로 지정돼 있다. 진주성 하면 우선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義妓)논개를 떠올리게 된다. 진주성이 호국충절의 성지(聖地)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공해 올 때,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그것이 바로 대첩 중의 대첩으로,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8개월 뒤인 1593년 6월, 설욕을 노린 왜군이 10만여 명으로 재침하자 이곳 진주성의 7만 민·관·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모두가 장렬하게 순절(殉節)했다. 그리하여 결국 이곳 진주성은 429년 전에, 진주인 모두의 죽음으로, 쟁취한 소위 진주정신인 저항, 주체, 평등정신과 같은 대한민국 최초의 위대한 지역정신 산생(産生)의 근원지임을 온 천하에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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