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남명(南冥)과 진주의병(晉州義兵)
[경일춘추]남명(南冥)과 진주의병(晉州義兵)
  • 경남일보
  • 승인 2022.07.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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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국립경상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 


우리나라에서 대규모의 의병이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때는 임진왜란(1592∼1598년) 7년 동안이었다. 임란 초기에는 관군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국토가 왜군에게 마구 짓밟히고 있을 때, 사방에서 향토를 수호하자며 의병들이 나섰다. 이 자발적인 의병은 모두가 나라에 대한 충의(忠義)를 내세우고 봉기했던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실제 그들의 주축은 주로 농민들이었고, 이를 조직하고 지도했던 의병장들은 대개 지방의 토호인 양반과 유생들이었다.

사실상 임란 당시에는 진주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매우 왕성했음에도, 현재까지 진주목 내에서 임란의병의 봉기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진주지역은 남명(南冥) 조식의 제자들 중 곽재우(郭再祐) 등 57여 명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다는 관련 문헌이 남아 있다. 진주지역의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보다 왕성했다. 즉 1593년(선조 26년) 1월 조선조정의 전국 전투 병력인원에 관한 통계자료에는 관군 13만 6700명, 의병 2만 2900명으로 돼 있다. 특기할 사항은 의병 중 정인홍이 3000명, 곽재우가 2000명, 김면이 5000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경상우도 의병이 1만 여명으로 전국의병 숫자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일찍부터 경상우도의 망우당 곽재우는 일본이 침략한 10일 만인 1592년 4월 22일 전국에서 제일 먼저 자기의 많은 재산을 기꺼이 헌납하고, 또 자기 집 종 10명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이후, 잠깐사이에 수천 명까지 늘어났다고 돼 있다. 정인홍, 김면 그리고 곽재우 등 3대 의병장의 활약이 특출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의병운동은 전국에서 경상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대규모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상기와 같은 경상도 지방의 모든 의병활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그 무엇보다도 곽재우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 제자들에 대한 남명의 ‘불의(不義)에 대한 철저한 투혼실천(鬪魂實踐)의 가르침’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영남의병들의 역할로 왜군의 낙동강 방어선과 1592년 10월 10일 진주성대첩을 달성함으로써, 일본군 호남진입의 차단과 동시에 군량을 비롯한 군수, 민수물자의 수송 등 병참 보급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 동안의 진주를 포함한 전국의 의병운동뿐만 아니라, 조선말기의 항일 독립군의 저항운동까지도, 필시 그 모두가 남명 조식의 ‘불의에 대한 결사일전의 선비정신’이 그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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