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9)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9)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7.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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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 선생의 ‘수필’은 짧은 글입니다. 수필로 쓴 수필론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이 글에 반해서 수필을 쓰게 됐다 하고, 어떤 이는 이해가 쉽지 않은 글이라 합니다. 보는 이의 눈에 따라서, 귀에 들리는 데 따라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정말로 향취 높은 명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수필’과 함께 사람이 적게 다니는 고요하고 평탄한 길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는 여유로.

“수필은 청자(靑瓷)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줏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플로니우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져 있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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