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진주시 이반성면 충의사(忠毅祠·도문화재자료 제61호)는 ‘남에는 이순신, 북에는 정문부’라고 할 정도로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정문부 장군의 사당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북관대첩비(북한 국보문화유물 제193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방 지역 왜적과의전투에서 연전연승한 명장이다. 그런데도 진주지역에 그의 위대한 행적과 공적을 표창(表彰)할 수 있는 유적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鄭文孚:1565∼1624년)장군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겸 의병장으로 1565년 서울 남부 반송방 남소동 출신이다. 1584년 생원 진사초시에 합격, 이후 한성부 참군으로 발탁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이 되어 함경도 길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였던 최창대가 임란 시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위대한 문화재인 북관대첩비를 건립함으로써, 임란 중 육지에서의 위대한 승리들 중의 하나로 빛나고 있다.
정문부 장군과 진주와의 특별한 인연은 1618년 창원부사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그해 7월 진주촉석루 준공식에 참여했다. 이 인연으로 진주의 풍토가 매우 순박하고 아름다움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임란 시 진주인들의 충의정신 관련 촉석루 현판시(지금도 촉석루 경내에 걸려 있음)’ 한 수를 지어 당시 진주목사 남이흥(南以興)에게 희사했다. 돌아간 뒤에는 그의 두 아들 대영(大榮)과 대륭(大隆)에게 “벼슬을 더 이상 구하지 말고 진주에 가서 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언에 따라 동생인 용강공(龍岡公) 정문익(鄭文益)이 농포의 두 아들인 조카 대영과 대륭을 데리고, 1625년 진주로 와 비봉산 인근의 옥봉동과 봉곡동 일원에 살게 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적지 않은 그의 현손들이 진주지역에 살고 있다고 전해온다. 둘째아들인 정대륭은 1629년(인조7년) 남강의 의암(義巖)바위의 벽면에 ‘義巖’의 글자를 전서체로 새겨, 지금까지도 그의 충절심과 예술성을 추앙(推仰)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연으로 임진왜란 때의 정문부 장군의 진정한 애국 충절정신과 함께, 진주에 대한 애틋한 진주사랑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빛나는 문화재로 남아있다.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해주 정씨 문중에서 충의사, 가호서원 그리고 북관대첩비를 다시 세워 이곳 진주의 역사 문화의 수준을 고양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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