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입는다 (33)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입는다 (33)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8.2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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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교육과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꼬(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꼬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는 아사꼬 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나는 아사꼬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아사꼬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 아사꼬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꼬 생각을 하곤 했다.-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돼서 무엇보다도 잘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꼬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이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꼬의 집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꼬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 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꼬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더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꼬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린 피천득 선생의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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