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유미주의자들의 역발상
[경일포럼]유미주의자들의 역발상
  • 경남일보
  • 승인 2022.09.0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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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이형기가 유미주의자가 된 데는 6년제 진주농림학교에 재학할 때의 은사인 이병주의 조언에서 비롯된다. “선생님, 이 시국에 ‘살로메’와 같은 퇴폐적인 시극을 굳이 무대에 올려야 합니까?” “이 군. 오스카 와일드가 왜 좁은 문으로 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이형기는 먼 훗날 오스카 와일드가 자유를 실증하기 위해 넓은 문을 택했다고 봤다. 이형기의 시와 산문에는 고향 진주에 관한 얘기가 거의 없다. 고향은 운명이 아니라 우연히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 존재의 뿌리를 거부하는 데서, 그의 문학이 출발했다. 사실 고향이니 존재의 뿌리니 리얼리즘이니 하는 건 좁은 문이다.

나의 은사하기도 한 이형기는 술자리에서 늘 그랬다. 문학? 좋지! 일본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고 있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어록이었다. 그는 내 기억의 재고 속에 남을 무수한 어록을 쏟아냈다. 이형기가 내게 남긴 최고의 어록은 다음의 말. 인간 못된 게 예술한다. 예술인 중에서 십중팔구가 양식이 있는 선인(善人)이다. 근데 왜 예술가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걸까?

도덕적 세평과 예술적 성취는 별개라는 얘기다. 세계 질서에 순응하면, 자유는 없다. 문학과 예술은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란다. 대단한 역발상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불행이 대표적이다. 그가 재창조한 살로메는 팜 파탈의 전형이요, 세기말 병적 감수성의 꽃이었다. 사모하는 사람의 목을 요구하는 집요한 애착의 잔혹 미학! 어제 9월 5일로 5주기에 이른 마광수 역시 이형기 못지않은 유미주의자였다. 그가 말한 ‘(좋은) 야한 여자’와 즐거운 사라는 20세기 말의 살로메였다. 그는 이 좋고도 즐거운 치명적 여자들 때문에 결국 불행해졌다. 그는 세계에 순응하지 못하고 세계와 불화를 일으키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유미주의자들은 역발상에 능했다. 오스카 와일드 왈(曰), 넓은 길로 가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 마광수 왈(曰),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섹스를 함으로써 사랑하게 된다.

이형기와 마광수는 문학을 각각 전복과 배설이라고 했다. 이 두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유미주의는 성격이 다르다. 내가 잘 알지만, 이형기는 참 욕심이 없는 분이다. 특히 돈 욕심이 없었다. 이형기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부질없는 욕망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짙어가는 허무의 빛깔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이에 반해, 마광수의 그것은 욕망 중에서도 성적 욕망 즉 리비도에의 구심력이 존재의 뿌리가 된다는 생성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 내 문학관은 유미주의와 거리가 멀다. 나에게 문학은 인간이 온전한 아름다움이랄까, 지복(至福)의 몽상을 누리지 못한 데서 기인한 몸부림의 언어, 고통의 언어다.

십 수 년 전이었다. 김지하가 재외 한인을 대상으로 유럽에서 특강을 했다. 마침 출장 중인 한 기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강연을 마친 후에, 이렇게 물었다. 엊그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는데, 우리도 수상자가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화를 벌컥 내면서 답했다. 상 받으려고 문학합니까? 괴로우니까 문학하지. 문학에는 이처럼 상반되는 관점이 늘 존재한다.

문학? 좋지! 혹은, 괴로우니까 문학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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