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5)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5)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9.0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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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자꾸 멀어져서 끝내는 잊고 만다.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 잊히는 거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늘 가슴에 담겨있어서 눈에 안 보여도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은 압니다. 말도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 때 울면서 사라지고, 사랑하는 이가 없을 때 말은 죽습니다. ‘한가위’라는 말도 그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겨레에 팔월 보름 한가위는 수천 년을 살아오는데 ‘한가위’는 쫓겨나고 들어온 돌 ‘추석’이 한 통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말에서 사랑을 거두고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주권을 잃으면 나라를 잃지만, 주권은 다시 찾아와 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말을 잃으면 주권도 나라도 겨레도 영원히 없어진다.’ 이 말은 상식이 된 지 오랩니다. 왜정 때 일본이 우리말을 없애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우리 선현들이 말을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말 팔아서 잘 먹고 잘사는 이 나라 말쟁이들은 그런 일이 이 땅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조국을 잃고 거의 2000년을 헤맨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불쌍한 한겨레와 한가위를 위해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주십시다. 힘내라고. ‘추석’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한가위’라는 이 말 한마디가 이 겨레 이 나라를 천년만년 지켜주는 힘이지 싶습니다. ‘겨레의 말’이란 말은 그 겨레의 가슴에 은은히 배어 내려오는 감성이거니 합니다. 뜻만 말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 민족에게는 두 개의 달이 있다. 정월 보름달과 팔월 한가위 달이다. 나는 한가위 달을 좋아한다. 정월 보름달은 한해의 무사태평을 비는 주술의 달이지만, 한가위 달은 감사를 드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추석’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추석’을 한자로 쓰면 秋夕이 되는데, 내 짧은 한자 실력으로는 아무리 해석을 해 봐도 ‘가을저녁’이 되기 때문이다. ‘가을저녁’엔 왠지 소슬한 바람 냄새가 난다. ‘추풍취부진(秋風吹不盡)’에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가 외로움을 잣아 올리는 것이다. 게다가, 갈대처럼 휘둘리는 서민들의 삶이란 게, 하긴 한 줌 목숨도 그렇겠지만, ‘추석’은 ‘추풍낙엽’까지 데리고 들어와서 어디로 쫓겨가는 야윈 강아지같이 서글픔을 주는 것이다. ‘추석달.’ 입에 담아 뇌어보면 떠오르는 달 맛 또한 벙싯하기는커녕 깡마른 차돌 맛을 내고 만다. 이러니 어찌 명절 기분이 나랴.

‘한가위.’ 생각만 해도 입맛이 고솜하다. 빼빼 마른 느낌을 주는 ‘추석’보다는, 어휘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푸근하고 넉넉한가. 어머니의 품처럼 정겹다. ‘한가위’에는 서글픈 추풍도 불지 않고, 애타게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도 없다. 오직 벙싯거리는 웃음과 ‘어, 왔냐!’ 문 열고 마중 나가는 반가움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풍만한 달이 두둥실 뜨면 강강술래의 원무도 돌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가 절로 나오고 만다. 활개를 펴고 가슴을 열면, 아름 가득 안기는 연인처럼, ‘한가위’의 들판은 또 얼마나 풍성한가. 말 그대로 달덩이 같은 기쁨과 풍요로움이, 선연, 바라는 것은 무엇이라도 금세 다 이루어질 것 같은 풍요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 (배정인 ‘한가위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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