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중(中)’과 ‘등(等)’
[경일포럼]‘중(中)’과 ‘등(等)’
  • 경남일보
  • 승인 2022.09.1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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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홍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임규홍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야당은 지난 5월 3일 무소불위였던 검찰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놓고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시행하기도 전에 이 법률이 무용지물이 될 지경에 놓였다. 글자 한 자 때문이다.

2020년 2월 여야와 검찰·경찰은 ‘부패범죄, 경제범죄, 공직자범죄, 선거범죄, 방위사업범죄, 대형참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제4조 1항)에 대해 검사가 직접 수사를 할 수 있게 한 검찰청법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이 법을 올 5월 야당이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를 열어 ‘부패범죄와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6개의 주요 범죄를 두 개의 주요 범죄에 한해서 검사가 직접 수사할 수 있도록 했으니 누가 봐도 검사의 수사권은 허수아비가 될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법률안에 쓰인 글 자 한 자 속에 있었다. 법률안에 쓴 ‘중(中)’ 자와 ‘등(等)’ 자다. 의존명사 ‘중’과 ‘등’의 의미 차이는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중’은 대상을 ‘한정’하는 뜻이고, ‘등’은 대상을 ‘개방’하는 뜻이다. ‘등’은 우리말 ‘따위’에 해당하는데 ‘등’ 앞에 쓰인 대상 ‘그 밖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등’ 앞에 쓰인 말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등’ 앞에 나열한 말들의 의미를 묶을 수 있는 말을 ‘등’ 뒤에 써주어야 한다. ‘등’ 한 자만 쓰고 그 뒤에 한정하는 말이 없으면 ‘등’ 앞에 나열한 낱말의 특성을 정확하게 규정알 수 없는 어름한 문장이 되고 만다. ‘등’이 쓰인 문장의 의미 중심은 등 뒤에 쓰인 한정어에 있다. 그런데 이번 법률을 제정한 야당에서는 그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게 본 것으로 보인다. 법률에서 ‘부패범죄와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라는 표현을 부패범죄와 경제범죄 이외 이와 비슷한 내용의 중요범죄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범죄를 포함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는 검찰이 모두 수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등’ 앞에 제시된 대상은 단지 그 보기일 뿐이다.

또 하나는 낱말의 뜻넓이(범주) 잡기다.

법무부는 부패 범죄와 경제 범죄를 재분류해 검찰 수사 범위를 2020년 개정법률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공직자의 허위공문서 작성이나 직권 남용, 선거 범죄에 해당하는 매수 및 이해 유도, 기부 행위를 부패 범죄로 규정해 검찰 수사가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약 유통이나 방위 산업 관련 범죄도 경제 범죄에 포함시켰다. 이것도 말이 가진 의미 범주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말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경계짓는 문제다. 이번 법률안에서 검사에게 수사권을 준 두 범죄가 부패범죄와 경제범죄인데 문제는 부패범죄와 경제범죄의 뜻넓이가 매우 넓다는 것이며 그 경계지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중요범죄 중에서 이 두 범죄의 뜻넓이 속에 들어가지 않는 범죄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공직자범죄와 선거범죄를 부패범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정치권 특히 진보의 숙원이었던 검사수사권조정 법률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했지만 글자 한 자 때문에 헛일이 된 것 같다. 내가 말한 뜻대로 상대가 받아줄 거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말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 속에는 수많은 함정과 오류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말하기가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것이다. 특히, 말 한 마디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공공언어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표현해야 한다. 정부의 꼼수일까. 야당의 실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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