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칡꽃 향기는 죄가 없다
[경일시론]칡꽃 향기는 죄가 없다
  • 경남일보
  • 승인 2022.09.1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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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기 (논설위원)
한중기 논설위원


추석 성묫길에 맑고 달콤한 향기에 취해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했던 곳이 있다. 온 산을 뒤덮어 제 말고는 다른 모든 식물을 고사시켜버린 공포의 식물, 칡꽃에서 풍겨나는 싱그러운 향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칡이 뿌리를 내린 산이나 들판은 이태만 방치하면 울창한 칡넝쿨이 괴물처럼 변해 소나무든 뭐든 닥치는 대로 휘감아 말라죽게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전봇대도 휘감아 어두컴컴해질 무렵 오가다보면 온갖 형상을 한 칡넝쿨 더미를 만나게 된다. 산과 들판을 뒤엉키게 해 난장판을 만든 칡은 그러나 늦여름이면 짙은 홍자색 꽃잎에 노란무늬가 박힌 고고한 자태의 꽃을 피워낸다. 향기도 진하고 강렬해서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갈등(葛藤)의 원흉(?)이면서도 맑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 한번 취하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묘약 같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칡꽃이 ‘불설비유경’에 등장했을까 싶다. 성난 코끼리에 쫓겨 우물로 피해 급한 김에 칡넝쿨에 매달려 정신을 차려 아래를 보니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위에는 성난 코끼리가 아직도 지키고 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흰쥐와 검은 쥐가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데, 문득 칡꽃향기 속 꿀벌에서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하는 이야기다. 생사가 달려있는 와중에 달콤한 꿀맛에 취해있는 모습이 마치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와 흡사하다.

추석 밥상에 오른 여야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불경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인간 모습이 겹쳐져 보인다. 성난 코끼리처럼 달려드는 위태로운 국제정세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금리와 물가는 생쥐처럼 국민들을 괴롭히는데도 정치는 다음 총선과 대선을 노리는 권력놀음에 빠진 것이 달콤한 몇 방울의 칡꽃 꿀맛에 취해 있는 듯하다. 2600년 전 부처님이 마치 오늘날 우리 정치권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정권을 창출한 여권은 2년 후 총선 공천권을 거머쥘 당권다툼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권력을 잡은 다음 30대 청년 정치인을 용도폐기하려는 기득권 정치세력의 수준 낮은 정치력을 보노라면, 나라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국민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청년 정치인의 행태 역시 기성 정치세력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권력 쟁취에 함몰된 언행은 딱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타협과 설득 대신 법률적 판단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은 정치인이라 부를 수 없다. 여권의 자중지란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한데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사분오열 분열된 난맥상을 보이니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치지 않는 게 이상할 일이다. ‘믿음 가는 구석이 한 곳도 보이지 않다’는 게 냉정한 추석민심이다.

야당 복도 없기는 매 한가지다. 새로운 당 대표의 선출과정부터 시작해 갈라치기의 명수답게 확실한 편 나누기로 당권을 거머쥐었다. 민생과 나라살림은 아예 고려대상으로 삼지 않은 듯 대통령부인 특검법 발의와 법무부장관 탄핵 시사를 시작으로 대여 강경 투쟁을 선포했다. 추석 밥상에 제물로 올려 전쟁을 벌이겠다는 심산이었다. 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실을 정치탄압이라는 프레임을 짜고서는 ‘네 편’에 대한 분노와 ‘내 편’에 대한 열광을 자극하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를 벌이고 있다. 상대에 대한 증오와 조롱은 정권의 실패를 바라는 저주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권력을 빼앗아 간 자에 대한 분노 게이지를 최대치로 높여 기필코 권력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여야 할 것 없이 달콤한 권력욕에 빠진 사이 국민들은 그들이 펼치는 ‘편싸움’의 노리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칡꽃향기는 죄가 없다. 온 산에 뒤덮인 칡넝쿨을 다 없앨 수 없는 노릇이다. 적절한 관리로 생태계를 유지시켜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제라도 품격 있는 갈등관리로 칡꽃향기처럼 달콤한 정치를 펼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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