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실로 황홀한 맛이었다. 한효순(1543~1621)의 집에서는 더덕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1568~1619)은 땅속에 큰 집을 지어 기른 채소에 다른 맛을 가미했다. 광해군은 이충이 가져오는 진귀한 음식이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았다. 침채 정승에 잡채 판서까지 등장했다. 요즘은 개고기를 먹는 것이 동물애호가들의 반대에 부닥치면서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과거에는 개고기를 즐겨먹었다.중종 임금 때는 개고기를 뇌물로 바쳐 요직을 차지한 이팽수 같은 이도 있었다. 그의 별명은 개고기 주사(대통령 비서실의 6급 주무관 정도의 직급)였다. 크고 살찐 개를 잡아 개고기 마니아였던 좌의정 김안로(1481~1537)에게 구이(犬炙)를 바쳤다.
조선 후기 진주 관아에서 개고기는 마리당 5돈이었다. 개 한 마리를 바치면 세금 5돈을 납부한 셈이다. 5돈은 갈비 2짝 값과 맞먹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개고기를 즐겼다. 그는 유배 중인 형에게 개고기 예찬론을 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산에게 개고기 조리법을 전수한 장본인은 실학자 박제가(1750~1805)였다. 인정(人情)이라는 말은 뇌물을 뜻했다. 뇌물을 많이 주는 것을 인정이 많다고 했다. 뇌물은 약과에서 시작해 관료들의 부패가 점점 심해지자 잡채, 김치, 더덕, 국수, 산삼, 고기포로 수위를 높인 찬합들이 오갔다.
조선의 관리들은 추천인이 있어야만 연임할 수 있었다. 진주 수령들은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올 때마다 최고의 만찬으로 접대했다. 진주라 천리 길, 대궐과 거리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덕은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 하여 사삼(沙蔘)으로 불렀다. 한효순의 더덕 밀병은 더덕정과다. 이충의 뇌물은 조선잡채다. 조선잡채는 진주 남명학파가 정권의 중심이었던 광해군 재임기에 진주로 전파되어 재료의 배합이 더 풍성해 졌다.
조선잡채는 당면 없이 소고기 편육, 고사리, 죽순, 전복 등을 골패 모양으로 썰어 겨자즙으로 무쳐낸다. 하루 전, 양념을 숙성시켜 잔치 때 바로 무쳐 상에 올리면 쉽게 상하지 않고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산해진미의 재료들을 꽃처럼 돌려 담은 조선잡채는 한양 관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미각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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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외면한 '개 물림'…8살 아이는 발버둥쳤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개물림이 자주 발생하는데, 한국이 느닷없이 개의 천국이 될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전에는, 동아시아의 오랜전통인 개고기 식용은 인류의 오랜 식습관으로 놔두는게 좋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