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8)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8)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9.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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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시골 살 때다. 옆집은 넓은 마당에 남새밭까지 끼고 있어서 그런지, 절간 같았다.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늙수구레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그 집을 ‘딸부자 집’이라 했다. 셋이면 기둥뿌리도 안 남는다는 딸이 일곱이라 했다. 남아선호가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딸 일곱 낳은 그 부인이 겪은 고통은 말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상강 무렵의 애호박 같은 아들이 하나 달려 나왔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무슨 사달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독재.’ 그 집 아저씨를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세상에, 아무리 그렇다고 ‘독재’가 다 뭐냐.” 나는 혼자 웃곤 했다. 헌데,(…)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원래 부모가 내린 이름은 동량재라는 뜻을 가진 ‘김동재’인데, 딸들이 ‘김독재’로 개명 아닌 개명을 한 거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딸이라며 얼른얼른 ‘치워버리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하니, ‘독재’로 불릴 만도 했다.

딸 셋만 되면 묻지 말고 장가가라는 속담 탓인지, 이 집의 7공주는 하나같이 선녀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별별 총각들이 떼로 몰려들어, 아주머니는 그 불한당들을 쫓고 딸 단속하느라 ‘전생에 죄가 많아서’가 그칠 날이 없었다. 독재 아저씨는 달랐다. (…)남자가 사지 성하고 밥 안 굶을 만하다 싶으면, 한 해에 둘도 좋고, 동생이 먼저 가도 좋고, 형편 닿는 대로 ‘치워버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가위. 이날은 7공주가 다 모이는 날이다. 정때가 되면, 마당엔 덕석이 깔리고 웃음소리가 우리 집 버력 담을 넘어온다. 딸 많은 집 딸들은 딸만 낳는다고, 손이 귀한 집에서는 며느리 삼기를 꺼린다는데, 그것도 말짱 헛말이었다. 이 집 7공주는 약속이나 한 듯이 첫 번에 다 아들을 낳은 것이다. 또 둘째들을 낳았는데, 1·2·3·4는 아들, 5·6·7은 딸을 낳았다. 딸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삭막한지는 겪어본 사람이면 다 아는 터라, 1·2·3·4는 딸 하나만 더 낳아 달라고, 사내들이 목을 맨다. 그러면 각시들은 또 아들이면 어쩔 거냐고 ‘아이구 이 주책’ 짐짓 주먹총을 놓으며 눈을 흘긴다. 맏이가 이러면 2·3·4 부마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합창을 해댄다. 왕비로 모시겠노라, 한가위 달을 두고 맹세하겠노라. 그럴 땐 다섯째 부마가 큰소리를 친다. ‘형님, 제가 딸 낳는 비법을 알려드릴 테니까, 술 한잔 건사하게 쏘십시오.’ 그러면 여섯째가 덩달아 나선다. ‘암요, 거 딸 아무나 낳는 거 아닙니다. 허음.’

멍석에 둘러앉은 7공주와 그 짝들과 아이들, 목개불은 홀로 몽개고 있고, 하늘엔 휘영청 둥근 달, 얼큰한 동동주 잔에 웃음꽃이 오고 가면,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인들, 코 떼어 줌치에 안 넣을 수가 없다. 그뿐인가. 이 선남선녀들의 노랫가락에 춤이라도 어우러지면, 독재 아저씨도 더는 못 참고 방에서 나와 슬금슬금 끼어들던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담장 너머로 독재 아저씨네의 한가위를 훔쳐보곤 하였다.(…)’

경험 안에 없는 사물이나 현상을 그려보거나(상상) 실제에 없는 일이나 물건을 상상을 써서 만들어보거나(허구), 머리 안에서 그려보는 거지요. 이러다가 과거의 표상을 재생하거나 새로운 일이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다 머리 안에서 이루어보는 나만의 말이지요. 이것이 창조의 지평입니다. 이 말을 남도 듣볼 수 있게 이야기로 적어내면 그게 글이요 작품이지요. 이런 에세이·수필에 허구(거짓말) 딱지를 붙여 ‘인격’을 매도한다고 우기는 걸 보면, 그냥 웃지요. 이 ‘한가위 뜨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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