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1]박상절의 ‘기락편방’과 낙동강 선유
경남의 고문헌 [1]박상절의 ‘기락편방’과 낙동강 선유
  • 경남일보
  • 승인 2022.10.1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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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비석돌 찾아 낙동강 뱃놀이
물길 여전한데, 명장의 발자취는 아련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은 경남지역 문중과 독지가로부터 기증·기탁 받은 고문헌이 10만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경남의 소중한 기록문화자산이다. 이제 그 가치를 발굴, 현대적 의미를 부여할 때다. 이에 소장 고문헌 중 특징적인 고문헌을 발굴해 내용과 의미, 고문헌의 현장과 인물, 고문헌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파악해 보기 위한 ‘경남 고문헌의 현장’ 기획을 마련했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가 길잡이로 나서 고문헌 속 세월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함안 용화산 아래 낙동강 뱃놀이 ‘선유’
간송당 그림 토대로 ‘기락편방’을 간행
고문헌도서관에서 채색 그림으로 복원

 
도흥보에서 비석을 찾는 모습
◇선유 기록의 발견

고문헌은 오래된 고서·문서·목판·비석 등의 역사기록물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다.

고문헌도서관에서 소장한 자료 중 오림 김상조 씨가 기증한 고문헌을 살피다가 ‘기락편방(沂洛編芳)’이란 책을 발견했다. 책을 펼쳐보니 여덟 장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림은 활자로 표현할 수 없으니, 틀림없이 목판으로 인쇄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 간행한 의궤가 아니고서는 그림이 들어 있는 고서는 매우 희귀하다.

고서에는 요즘 간행되는 책의 판권지와 같은 것이 없으니, 고서 정리가 매우 어렵다. 책 지은이, 출판자, 출판 시기에 관한 기록은 책 구석구석에 꼭꼭 숨어 있다. 책장을 앞뒤로 넘기면서 꼭꼭 숨어 있는 책의 정보를 알아내야만 책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랑하거나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겸손 문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책의 서문과 발문, 주인공의 행장 등을 꼼꼼히 살펴서 책의 비밀 퍼즐을 맞추어 나가야 한다. 그 비밀을 하나하나 찾아서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고문헌 연구의 즐거움인 것이다. 고문헌 연구에는 역사와 인물, 문화 등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니, 지금부터 415년 전인 1607년 봄,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인 기강진에서 영남 선비들이 모여 이십 리쯤 떨어진 낙동강 하류 망우당 곽재우가 살던 창암정(滄岩亭)까지 조각배를 나누어 타고 내려가면서 경치를 구경한 선유(뱃놀이)의 기록이었다.

이때 모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 당시 영남의 큰 선비였던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과 문인들, 광서 박진영,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망우당 곽재우, 그리고 그와 친밀하게 교유했던 임란 의병장들이었다.



◇낙동강 선유의 계기

낙동강 선유의 발단은 한강 정구가 함안군수로 재직할 당시 선조의 비석으로 사용할 돌을 구해 두었는데, 당시에는 운반하지 못하고 강가에 그대로 두고 떠나간 데서 비롯된다. 20여 년이 지난 뒤 그 돌을 찾기 위해 용화산 아래를 다시 찾아왔다. 혹시 돌이 모래에 묻히고 강물에 가라앉아 찾지 못할 것을 염려해 인부들을 동원해서 찾게 했다. 한강은 인부를 동원해서 비석을 찾을 정도로 이 돌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은 먼저 망우당 곽재우가 머무는 창암정에 가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시우포 경양대 내내촌을 거쳐 도흥보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묵었다. 그리고 3일째에는 용화산 아래 현재의 합강정 인근에서 잃어버린 돌을 찾고 있었다. 한강은 자신의 방문 계획을 알리지 않았고, 선유도 계획하지 않았다.

 
고문헌도서관에서 복원한 용화산하동범도
◇낙동강 선유 순서

선유는 간송당 부자와 인근 지역의 선비들이 한강을 찾아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607년 3월 28일. 퇴계와 남명학파 인물이 낙동강 칠백 리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함안군 대산면 용화산 아래에 모였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로 동북쪽을 경상좌도, 서남쪽을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이곳은 청량산에서 흘러나와 안동을 거쳐서 흘러온 낙동강과 지리산에서 흘러나와 덕산을 거쳐온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두 강이 만난 것처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경상좌도와 경상우도 학자들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날 이루어진 것이다.

모인 인물은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 광서 박진영 등 35인으로, 대부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을 주도했거나 그 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었다. 화왕산성 전투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참석했다. 이들의 모임은 함안 선비 간송당의 부친 입암 조식과 숙부 두암 조방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손님을 위로한 데에서 선유가 시작됐다. 선유에는 으레 기생과 풍악, 그리고 술판이 벌어졌을 법하지만, 이 모임은 매우 엄숙하고 격식을 갖추어 이루어졌다. 선유의 순서는 용화산 북서쪽 용화암에서부터 시작해 청송사~도흥보~내내촌~경양대~시우포~평사면~청암정까지 함께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교유하는 것이었다.

 
함안 능가사가 있는 내내촌. 낙동강 벼랑 위에 능가사가 위치해 있다.
◇선유 유적지를 찾아가다

고문헌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 고문헌에 기록된 현장으로 달려가서 관련 유적과 인물을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낙동강 선유기록에 의하면, 답사는 낙동강 상류인 용화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내 차의 내비게이션은 망우당 곽재우가 만년에 은거한 망우당유허비에 맞추어져 있었다. 고속도로 창녕 요금소와 가깝기 때문이다. 낙동강 선유 답사는 반대로 이루어졌다.

창암정은 선유의 마지막 종착점이자 망우당이 만년에 노닐었던 곳이다. 망우당은 1599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선조에게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도리어 탄핵을 받아 전남 영암으로 귀양을 갔다. 1602년 귀양에서 돌아와 낙동강 강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현재 이곳에는 창암정은 없어지고 망우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망우정, 1789년에 세운 망우당곽선생유허비와 1991년에 세운 공적비가 남아 있다. 선유의 마지막 종착지인 망우당 뒤 언덕에는 노거수가 그늘을 넓게 드리우고 있다. 노거수 아래에 서서 낙동강을 바라보노라니 멀리 낙동강 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노거수는 ‘우영우 팽나무’보다도 늠름하고 우람하다.

창암정 옆 평사면은 당시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기러기가 노닐었을 법하지만, 지금은 송진쇠나루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어 평사낙안의 풍광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남지대교를 건너 낙동강 강가에 있는 시우포(是藕浦)를 찾아갔다. 시우포는 지명으로 보아 남지의 우포늪처럼 연꽃이 가득한 늪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우포라는 말은 ‘이곳이 진짜 우포늪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곳에는 낙동강 선유에 참여한 조방의 반구정이 있었다. 조방은 임진왜란 때 망우당을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과 기강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른 인물이다. 망우당을 따라 의병에 참전했던 조방은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의 말바위(斗巖) 위에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의 반구정을 짓고 은거했다. 강 건너 망우당의 창암정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망우당과 깊이 교유했다. 반구정은 홍수로 유실되자 1858년 불타 없어진 용화산 중턱의 옛 청송사 터로 옮겼다. 현재 시우포에는 반구정 유허비만 우뚝 솟아 있다.

경양대는 높다란 석벽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현재는 칠서취수장이 설치되어 있어 접근할 수가 없고, 강 건너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낙동강 취수를 위해 드리운 취수관이 경양대 석벽을 가리고, 취수장 사업소 건물이 주변 경관을 망치고 있다. 칠서취수장을 만든 이들은 이곳이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임을 몰랐으리라 짐작이 된다.

내내촌은 현재 함안 능가사가 있는 마을로, 남지철교가 함안과 창녕을 연결하고 있다. 낙동강 석벽 위로 능가사가 위태롭게 올라앉아 있다. 마침 남지철교 옆으로 보트 한 대가 지나간다. 그때의 선유 모습이 아련히 연상된다.

내내촌에서 나지막한 산을 하나 넘으면 도흥보가 나온다. 도흥보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아닌데도, 선유 장소로 넣은 것은 바로 한강이 인부를 동원해서 비석을 찾은 곳이기 때문이다.

내내촌에서 용화산 허리를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용화산 기슭에 반구정이 나온다. 당시에는 청송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반구정이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 강가에 있는 조방의 반구정이 홍수로 유실되자 1858년 불타 없어진 옛 청송사 터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용화사 터는 반구정 차지가 된 것이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나가면 대소헌 조종도의 정자인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에는 용화암이 있던 곳이다. 합강정에 올라 은행나무 고목 곁에 서면 그 옛날 선유를 즐겼던 낙동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락편방의 형성 과정

한강이 이날의 돈독하고 격조 높은 선유 과정을 기록할 것을 권하자, 함안에 사는 진사 이명호가 종이와 붓을 준비해 기록을 남겼다.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후 모임의 날짜를 기록하고, 책 제목도 직접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 이름했다.

1620년 가을. 간송당 조임도가 서문을 지어 이날 선유의 전모를 기록했고, 1621년에는 화공을 구해 그날의 행사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림 위에 시를 적어 병풍으로 만들고, 한 폭의 작은 두루마리로도 만들어 벽에 걸어두고 감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림은 전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박상절은 간송당이 그린 그림을 토대로 삼아 1758년 ‘기락편방’을 간행했다. 여기에는 선유의 과정, 참여 인물, 지은 한시 등을 차례대로 수록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용화산하동범도’를 넣었다. 이 책이 오늘날까지 전하는 덕분에 415년 전 영남 선비들의 우아한 낙동강 선유의 전모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선유 그림은 목판으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그림 상태가 열악하다. 이에 고문헌도서관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용화산하동범록도’를 바탕으로 위성지도, 현장 방문, 문헌 고증 등을 거쳐 이를 다시 채색 그림으로 복원해 내었다. 이 그림에 영상과 뱃놀이 효과음 등을 결합해 전시한다면 더욱 현실감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낙동강 선유를 재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역사기록에 없는 것도 꾸며서 콘텐츠를 만드는데, 분명한 역사기록이 있는 것으로 콘텐츠를 만들지 못할 까닭이 없으리라.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기락편방 표지로 오림 김상조 기증
기락편방 중 용화산하동범도
기락편방 목판.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망우정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8. 용화산동범 위치도-1.용화암(현 합강정), 2. 청송사(현 반구정), 4. 도흥보, 4. 내내촌(현 남지철교 및 능가사), 4. 경양대(지암담), 6. 시우포(반구정), 7. 평사면, 8. 창암사(망우정)
창암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현재는 망우정과 망우당유허비가 있다.
시우포 반구대 유허비
경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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