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황석산성 전투(상)
[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황석산성 전투(상)
  • 임명진
  • 승인 2022.10.1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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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 산꼭대기서 하나 된 민·관·군
황석산성 전경

 

황석산성은 함양군에 있는 황석산 정상 부근에 쌓은 산성이다. 해발 1190m에 있는 이 산성에서 정유재란 당시 수만 명의 일본군과 수백여 명의 조선군민 간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당시 조선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본보는 창간 113주년을 맞아 황석산성에서 있었던 당시의 전투를 되살펴 보는 지면을 2편에 걸쳐 마련했다.

◇정유재란 발발, 목표는 전라도

황석산성은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빠지는 지금의 함양 황석산 정상에 있다.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체 산성 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듯 쌓은 산성이다.

당시 함양에 거주하던 선비 정경운은 자신의 저서 ‘고대일록’에 황석산성을 평가하기를 ‘성이 험한 것은 하늘이 만든 것이다. 만약 수년 동안 먹을 군량만 비축돼 있다면 왜노(일본)와 충돌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1597년 1월 26일자)고 했다.

이곳에서 정유재란 당시 최대 격전 중 하나가 벌어졌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명연합군과의 수년간의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1597년 7월, 정유년에 총 14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재침공을 한다.

1차 침공이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의 항복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면 2차 침공은 전라도로 진격하면서 조선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방면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으로 조선이 다시 협상에 응할 때까지 압박하려는 목적이 컸다. 일본군은 남해안의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대파하고 육지에서도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는 두 갈래의 진격로를 택했다.

전주를 공격하는 일본군 우군은 모리 히데모토를 대장으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이 가세했다. 울산 서생포에서 출발해 양산과 밀양을 거쳐 합천, 거창과 함양(안음)으로 진군했다. 남원을 친 고니시 유키나가의 좌군과 전주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군도 재침을 예상하고 청야전술로 맞섰다. 황석산성을 비롯한 남부의 주요 산성을 재정비하고 그곳에 주민과 식량 등의 물자를 집결시켜 방어전을 펼치며 적의 보급과 진격을 어렵게 하는 작전이다.

조선은 황석산성을 적이 반드시 빼앗을 것이라 여겨 인근 거창, 안음, 함양 등 세 고을의 군사를 예속시켜 안음현감 곽준에게 지키도록 했다.

◇시간 촉박했던 황석산성

고대일록 6월 12일자에는 ‘조카가 황석산성에 가서 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 성 쌓는 일이 지금의 급선무라고는 하지만 6월에 일꾼을 동원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적었다. 농사철에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황석산성은 재침에 대비해 개·보수 공사가 시작됐지만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했던 8월 2일에는 ‘성을 쌓는 일은 아직 절반도 안되었는데 적의 소식은 다급하게 들려온다’고 적고 있다.

세 고을의 군사를 예속시켰지만 거창현감 한형은 전투가 벌어질 때 부족한 병사 모집을 위해 성밖에 나가 있었다. 주장인 안음현감 곽준은 관직에 오른 지 겨우 2년에 불과했으며, 조종도는 전 함양군수로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가 후퇴하면서 외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체찰사 이원익이 김해부사 백사림으로 하여금 곽준을 돕도록 조치한 것이 유일했다.

나름 산성 방어전을 준비했던 조선이지만 일본군의 침공이 현실화되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일본군 우군은 지금의 서부경남을 지나면서 진주목사가 지키던 벽견산성과 정개산성, 경상우병사가 지키던 합천 삼가의 악견산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서생포(울산)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행장(고니시 유키나가)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원수(권율)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선조 30년 8월 1일 기미1번째 기사 1597년)

전방의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충격은 컸다.

‘벽견, 악견, 정개 등 세 산성을 모두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 하니 정말 한탄스럽다. 사람들이 놀라 흩어져 모두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니, 이 같은 상황에서는 뛰어난 장수가 있어도 국가를 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고대일록 8월 7일자)

◇최후의 결전 택한 황석산성

삼가의 악견산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곧바로 창녕으로 나아갔다. 이곳에는 의병장 출신인 곽재우가 경상좌도 방어사에 임명돼 1597년 7월 21일 창녕과 밀양, 영산, 현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 방어에 투입됐다.

“오직 의병장 곽재우만이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들어가서 죽기를 기하고 지키니 왜적들은 산성의 밑에 이르러 산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성 안의 사람들이 고요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지키는 것을 쳐다보고는 공격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 버렸다.”(징비록)

조선왕조실록에도 ‘곽재우는 임진년 이후 정진을 지켰고, 화왕산성을 지킬 때에는 파진하라는 격문이 전해진 뒤에야 비로소 나왔다’고 적고 있다.

화왕산성을 우회한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함양 일대의 주민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황석산성에 들어가는 대신 인근의 계곡과 산으로 숨어들었다.

‘북면으로 가다가 길에서 (황석)산성 소식을 들었는데 대단히 허술하다는 것이었다. 안음으로부터 북쪽 3리는 단지 5명이 들어갔으며 거창에서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함양 백성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무지 성에 들어갈 뜻이 없으니 끝내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고대일록 8월 12일)

고대일록을 쓴 정경운 본인도 가족들과 황석산성에 들어가지 않고 인근 백운산 등으로 피난을 갔다.

황석산성은 곽준과 조종도, 백사림 등이 이끄는 수백 명 남짓의 조선군과 그 가족, 일단의 주민들이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8월 15일 안음에, 16일에는 함양까지 밀려 들어와 산성을 포위했다. 앞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나친 일본군이 황석산성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난중잡록, 국방부전사 편찬위원회 등의 자료를 보면 성을 포위한 일본군이 ‘성을 비우고 나가면 추격하지 않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 성 안의 곡식을 넘겨줄 것을 회유했지만 조선군과 백성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전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일본군은 산성 주변에 많은 피난민이 숨어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황석산성을 포위한 16일부터 산성에 대한 공격과 주변지역 일대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동시에 진행했다.

황석산성의 남쪽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서쪽은 나베시마, 동쪽은 구로다의 군대가 각각 진을 쳤다. 이들의 규모는 최소 2만 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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