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1)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1)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0.1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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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살이 하는 동물을 사람이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생각을 내 밖으로 내보내는 신호가 말이요, 그 말을 글자로 적은 것이 글이라는 겁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자를 안다면, 글을 못 쓸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대표하는 예로 ‘수필은 아무나 쓴다’고 하지요. 그런데 또 이렇습니다. ‘몇 달이나 하면 등단할 수 있느냐. 수필이 이렇게 어려운 글인 줄 몰랐다. 자신을 적나라하게 들어내야 해서, 아무래도 수필은 못 쓰겠다.’ 정말이지 글쓰기는 쉽고도 어렵습니다. 김태길 선생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좋은 글을 쉽게 쓰는 방법과 태도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무언(有言無言)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실천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을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은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 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말이 아는 사람과 관련지어지는 끄나풀이라면 글은 모르는 사람과도 이어지는 동아줄입니다. 내가 써낸 글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읽는지는 알 수 없어요. 체험과 사색을 통하여 내 지성과 감성의 모습을 현학의 허세 없이 그냥 그대로 보여드려야 한다는 게 글이라는 겁니다. 비록 그 글이 에세이·수필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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