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경남의 역사]황석산성 전투(하)
[다시보는 경남의 역사]황석산성 전투(하)
  • 임명진
  • 승인 2022.10.3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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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앞에 드러난 민낯과 죽음을 불사한 충절
황석산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성에서 물러나면 뒤를 쫓지 않겠다고 회유했지만 조선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항전태세에 돌입했다.

일본군은 1597년 8월 17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안음현감 곽준은 수많은 적이 남문으로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격려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전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도 힘을 보탰다. 전투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황석산성


◇최후까지 싸웠다.

‘이달 17일에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왜적들이 올라와 성을 포위하였는데 여러 산의 봉우리마다 진을 치고서 무수히 포를 쏘아대니 4경(오전 1시~4시)에 함몰됐다’(선조실록 30년 9월1일)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만다. 성안의 여인들도 돌을 나르며 힘을 보탰으나 성이 함락되자 왜적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며 높은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피가 벼랑 아래의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피바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피바위.

 


황석산성의 피해 규모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관찰사 이용순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피살된 자와 죽은 노약자들이 총 100여 명이며, 서문 밖에서도 피살된 사람들의 수효도 많았다’고 했다.(선조실록 30년 9월1일)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은 ‘황석산성을 포위한 일본군이 성에 들어와 마구 죽이니 죽은 자가 500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피해는 오히려 산성 밖에서 더욱 컸다. 일본 측이 작성한 기록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안음군 안쪽의 황석산성은 8월16일 밤(조선력 17일) 함락해 성곽 안에서 353명, 산골짜기 여기저기를 장악해 나가면서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했다.

산성 밖에서 주민들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앞서 전방의 주요 산성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고립된 산성보다는 차라리 밖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일본군은 황석산성 공격과 동시에 17일부터 19일까지 산성 주변의 피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고대일록을 쓴 정경운도 일가족을 데리고 8일부터 백운산 등지로 피난을 떠났으며 그 과정에서 큰 딸을 비롯한 일가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집에 돌아온 건 30일, 마을 전체가 남은 것이라곤 없이 다 불태워져 있었다고 적었다.

 

황암사 전경


◇충절과 배신

많은 이들이 황석산성과 최후를 함께 했다. 전투를 이끈 곽준과 조종도는 남명 조식의 제자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준은 자신의 두 아들, 사위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곽준의 딸은 간신히 성을 빠져나갔다가 남편이 사로잡힌 소식을 듣고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같이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도 사로잡혔으니 내가 어찌 차마 홀로 살아 있겠는가’하고는 자결했다.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나는 (나라의)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순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며 아들과 함께 최후를 함께 했다.

모병을 위해 성 밖으로 나갔던 거창현감 한형의 아내는 성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딸과 노비와 함께 자결을 택했다.

하지만 이들과는 상반된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성안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과 만나 성이 함락당한 이유를 물어보니, 김해부사는 성을 넘어서 도망갔는데 당초에 부사가 백성들과 약속하기를 비록 죽을지언정 성에 남아 있겠다고 했고 백성들은 그 약속을 금석처럼 믿었다. 그런데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먼저 달아나 백성들이 모조리 왜적의 손에 함몰되게 했으므로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김필동은 왜적들이 성을 넘어오기도 전에 김해사람 20여 명을 인솔하고 몰래 성을 빠져나가 왜적에게 투항했다’(선조실록 30년 9월1일)

김해부사 백사림은 산성 방어에 힘을 보태라고 조정에서 따로 차출해 지원을 보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일가족과 함께 몰래 전장을 이탈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처음에는 성이 이미 거의 함락된 때라고 여겨 애초부터 성을 지키지 않아 패하게 된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해서 참수형 대신 백의종군의 처벌만 받았다.

그렇게 처벌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를 황석산성에 배치한 체찰사 이원익은 “지난 날 백사림을 추천한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고 전투에서 수비를 그르친 실상을 자세히 아는 것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사림이 김해의 이민으로서 적에게 붙은 자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더불어 몰래 도망칠 계책을 꾸며 끝내 혼자만 살아났기 때문에 분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며 중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선조실록 31년 1월5일)

당시 백사림에 대한 평가는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사림이 맡아 지키던 곳에서부터 성이 함락됐다. 곽준의 일가와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도륙 당하였는데, 사림은 노모와 어린 자식 및 그가 거느리던 김해 사람들은 모두 적의 칼날을 모면했다. 그러므로 남쪽 지방의 사론이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고 그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는 사람도 있다. 이는 힘이 부족해 패배한 경우와는 같지 않은 것인데 끝내는 백의종군시키는 것으로 처리했으니 형벌이 원칙을 잃었음이 심하다’


 

황암사

 

◇조선의 영웅으로 기억

황석산성 전투는 당시 조선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전쟁은 무려 7년을 끌면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즉 항왜라 부리는 자들과 거꾸로 일본에 협력한 조선인들도 생겨났다.

충과 효를 국가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있던 조선에서 황석산성 전투는 충효를 지킨 이들과 저버린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전투였다.

조선은 충절을 지킨 곽준과 조종도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 대한 포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함양 지역에서 추증을 받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이 많이 배출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을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했다. 특히 김해부사 백사림의 처벌을 놓고서는 왕과 신하가 갈등하는 상황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미 선조가 백의종군의 처벌을 내렸는데도 병조와 의금부, 사간원, 사헌부까지 들고 일어나 다시 중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심지어 백사림을 처음 조사한 예조판서 심희수 조차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다시 중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선조는 백의종군을 명한 자신의 명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곽준, 조종도와 같은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과 문도들이 백사림의 처벌을 다시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재차 논란이 불거졌다.

황석산성은 일본군의 재침에 조명연합군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운데 소수의 병력으로 임전무퇴의 기상을 보여 준 전투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측의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보면,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곽준, 조종도, 곽준의 딸 곽씨, 사위 유문호가 진주성 대첩의 김시민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조선 측의 영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관련 그림까지 전해지고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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