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3)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3)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1.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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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 별들, 풀들/ 또 이삭들 그리고 청람 빛 하늘과/ 한낮의 뜨거운 태양…// 때가 되면-신은 길 잃은 아이들에게 묻겠지요./ 지상에서 삶이 행복했느냐?// 그러면 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여기 이것들만 기억하겠습니다// 이삭과 풀들 사이 이 들판 길만을…// 그리고 기쁨의 눈물 절로/ 흘리며 아무 대답 못하고// 자비로운 그 발아래/ 가만히 엎드리겠습니다(이반 부닌, 이삭들)’

시라서가 아니지요. 말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 바탕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들리는 이야기들을 연민으로 듣고 보고 생각하고 하는 거지죠. 이 연민스러울 때를 우리는 좋아합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적는 것이며 누구에게 나를 바치는 기원일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쓸 때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쓸 때는 라파엘로가 그린 성화 ‘시스티나의 마돈나’ 아기 예수를 안고 구름 위에 서서 슬프고도 여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성모의 초상 앞에서, 기도가 하도 간절해 그가 기도할 때 아내는 그 방에서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사건을 그린 악마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고뇌와 갈등과 고통을 겪는 인간들에게 성모님의 은총을 기원했을 것입니다.

입동이 왔습니다. 이 겨울 끝에 봄이 오리라는 걸 우리는 기원합니다.

‘아지랑이를 물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한흑구. 보리)’

‘잠들어 있는 강가에 포플러 나무들/ 커다란 종려나무들처럼 부드럽게 휘어집니다/ 포근하고 조용한 깊은 숲에서 새가 파닥거립니다/ 초록빛 나무들은 즐거워하고/ 해는 왕관을 쓴 듯 힘차게 솟아오릅니다. (빅토르 위고. 봄)’

‘봄은 항상 짓궂은 웃음을 띠우고 언젠가 하루아침에 문득 옵니다. 그래서 벙글벙글 웃고 춤추는 아씨처럼 가만히 날아드는 봄은 마치 우리가 길에서 멀리 마주쳐오는 벗을 언뜻 본 때의 저 일종 복잡한 감정을 우리로 하여금 맛보게 합니다. 아, 봄! 봄빛은 참으로 어머니의 품속 모양으로 따스하고 보니 누가 그 속에 안기기를 싫어하리오. (김진섭. 송춘)’

‘어렴풋이 첫봄의 기운이 공기 속이나 언 수피(樹皮)속에 슬그머니 들어가고 있었다. 날개처럼 펼친 너도밤나무의 가지들에서는 눈 녹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느다란 바늘 같은 새순의 둘레에는 눈의 틈 사이를 통해 흡사 작은 입을 통해 하는 것처럼 축축한 검은 땅이 숨을 쉬고 있었다. 해골과 같은 숲속에는 맑고 날카로운 노래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듣고 보고, 그걸 어떻게 생각하고, 나아가 상상했는가에 이르면, 같은 봄 하나를 봤는데도, 열이 쓴 글에서는 다 다른 봄이 되고 마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생각하는 귀로 듣고 생각하는 눈으로 보고, 그것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상의 나래에 얹으면 곱게 빚어진다 합니다. ‘꽃이 되는 글은 체험과 사색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상하는 기록이어야 한다.’ 어떤 말은 기원의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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