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고기보다 귀했던 귀족의 사탕 ‘옥춘당’
[경일춘추]고기보다 귀했던 귀족의 사탕 ‘옥춘당’
  • 경남일보
  • 승인 2022.11.0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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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보릿고개는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었다. 1972년 통일벼가 보급되기 전까지 우리 민족에게 밥은 곧 신앙이었다. 조선시대 사람을 세는 접미사는 인, 명 외에 또 있었다. 목구멍을 상징하는 구(口)다. 노비를 셀 때는 구를 썼다. 밥과 찬의 구분 없이 바가지에 한데 담아 먹는 신분이었다. 노비는 일의 능률성 대비 곡식의 소비량으로 가치를 매겼다. 후식인 병과류와 음청류(식혜 등), 당속류(과자, 사탕)는 지배계급만 먹었다. 반서의 계급은 엄격히 지켜졌다. 서민이 특별한 날 외에 유밀과를 쓰면 곤장 60대를 맞았다. 안주를 갖추고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관가에 끌려갔다. 화문석을 깔아도 안되고 그릇도 양반의 것을 흉내 내 청자나 백자기를 사용하면 형벌에 처했다.

옥춘당과 팔보당은 잔치나 제사에 고이는 각색 사탕이다. 옥춘은 조상님이 오시는 길을 환하게 비춘다고 해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음식이었다. 쌀가루와 조청을 반죽해 겹겹이 붙인다. 모양이 맷돌을 닮았다 하여 ‘맷돌엿’으로도 불렀다. 반죽을 꽃모양 판에 굳힌 팔보당은 옥춘당과 함께 잔칫상에 높게 고여 진열한다. 사탕을 진상할 때는 항아리나 쟁반에 담았다. 무게를 달아 몇 근씩 진상한 기록도 있다. 단맛의 달콤한 유혹은 점점 다양해졌다. 연산군은 양귀비가 즐겼다는 과일 여지(리츠)를 구해오라 명했고 고종은 아랍의 건포도까지 수입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설탕으로 만든 눈깔사탕이 인기였다. 서울 진고개에 왜각시를 보러가는 인파가 몰려들자 눈깔사탕으로 부자가 된 일본인들이 있었다. 진주에서는 ‘나리또’라는 창기를 구경하러 갔다가 입이 터질 듯 커다란 사탕을 물고 돌아왔다.

중국에서 들어온 ‘각색당당’, 일본의 ‘각색왜당’은 설탕으로 만든 고가품이었다. 일본에서 후식류가 발달한 원인은 아열대 기후인 오키나와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어과자(御菓子)는 일본어로 ‘おかし(오카시)’다. 상자에 담긴 화과자다. 어과자는 궁중잔치에도 올랐고 부산 왜관을 통해 진주로 상륙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청으로 만드는 전통 사탕은 설탕보다 맛이 싱거운 편이다. 조청 1리터를 만드는데 쌀이 4킬로나 소요된다. 설탕에 비해 건강식인 셈이다. 쌀과 조청대신 물엿과 설탕으로 만든 현대식 옥춘당은 동네 마트를 전전하는 천덕꾸러기가 됐지만 조선시대에는 고기나 생선보다 귀했다. 혼자만 먹으라고 손에 꼭 쥐어주던 귀한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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