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4)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4)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1.0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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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뜻(의미)이 생명이지요. 이 의미 부분을 살려 쓰는 것이 생활에서 쓰는 말인데, 이때 말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말(의미가 같은)이지요. 이건 약속된 기호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나 기록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말은 인간이 쓰는 소통의 도구이므로 그걸 쓰는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가 말에 저절로 배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말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정서가 들어있는 거지요. 어투라 할 수도 있는 이 말새는 감정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 의미’라는 본래 낱말이 가진 뜻과 약간 다른 말로 태어나곤 합니다. 말의 뜻이 지각의 산물이라면 말의 맛은 감각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감이라고도 하나요. 느낌에서 얻어지는 의미, 이걸 우리 어른들께서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했습니다. ‘아’와 ‘어’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지요. 보기에는 단순히 ‘아’인데 ‘아’가 ‘아’하고 다르고 ‘어’는 ‘어’하고 다르다는 거지요. 지은 글을 고쳐 쓸 때 나는 이 말을 상기하곤 합니다. ‘말이 되게 쓴다’가 보이는 의미에 있다면 이 말은 매우 얇은 면사포에서 보이듯이 보일 듯이 하는 심상에 그려지는 그늘의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선학산이 있습니다. 언젠가 산책을 갔다가 들은 이야깁니다. 4월이었을 거예요. 점심 먹고 나갔으니까 늦은 2시쯤이었을까? 가풀길을 오르는데 앞에 할머니들이 세 사람 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들보다는 내 걸음이 좀 빨랐겠지요. 얕은 산이라 가푼 길도 순했지만, 할머니들에게는 힘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가풀막에 이어진 평평한 등성에서 할머니들이 허리를 펴면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러는 거예요.
“아이고, 저것 봐라 산에 버짐꽃이 핐다.”

건너에 있는 산은, 사월의 산은 온통 연초록 옷을 입고 볕바리를 하고 있는데, 거기 산벚들이 띄엄띄엄 하얀 옷을 입고 나와 있어 마치 너울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연한 초록빛 산에 듬성듬성 피어 있는 하얀 산벚나무꽃, 그게 할머니가 말한 ‘버짐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저것 봐라 산에 버짐꽃이 핐다.’ 내가 여태까지 읽은 시 중에 이보다 절실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시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상균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피부병의 하나. 마른버짐과 진버짐이 있음.’ 우리말 어느 사전에는 이렇게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짐이 뭔지 알 리가 없겠습니다만, 그 할머니에게 이 말은 서럽고도 서러운 의미를 지닌 언어일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살갗에까지 갈 영양이 없어서, 피부에 돈짝같이 피어나던 하얀 꽃, 그 꽃 이름이 버짐이었지요. 얼굴에 배고픔의 상징처럼 피어나던 버짐, 그 서러움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여 서러움을 위로받으며 살았던 어린 시절을. 그게 어찌 잊히겠습니까? ‘봐라 산에 버짐꽃이 핐다.’ 할머니의 가슴에 살아왔던 버짐꽃. 정말이지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눈물보다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말에는 역사성이 있습니다. 말이 체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체험에서, 겨레의 말은 그 겨레가 이어온 체험에서, 역사가 된 정서가 말엔 기억돼 있지요. 이 기억된 정서를 살려 적은 글보다 절실하고 정겨운 말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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