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한국 서원의 성립과 서원문화의 특성
[경일춘추]한국 서원의 성립과 서원문화의 특성
  • 경남일보
  • 승인 2022.11.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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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구 (남계서원 원장)
이창구 남계서원원장


한국의 서원은 조선왕조가 치국이념으로 채택한 성리학을 사대부계층이 차차 자신의 것으로 정착시키면서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향촌에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 서원’이 효시다. 백운동 서원은 이황의 노력으로 1550년(명종5) 2월 조정으로부터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7)에 건립돼 1566년(명종21)에 북한 문헌서원, 영천 임고서원에 이어 4번째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이후 서원건립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18세기 들어 당평과 사회 변동에 따른 사림세력의 몰락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변동 속에 훗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 사액서원 중 47개의 원사만 남기고 모두 훼철됐다. 이후 하나 둘씩 다시 생겨나 2011년 8월 기준 701개소(남한 637, 북한 64)가 남아 있다.

한국서원의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상급신분의 전인교육을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문을 통해 통치기술을 익힌 관리(官吏)가 필요했다. 국가에서 교사를 파견하고 지방관이 지원함으로써 이를 관학(官學)이라 부르는데 성균관과 향교가 바로 이것이다. 이후 인격과 덕성을 함양하는 전인교육 학교가 필요해 사학으로서 서원이 창건되고 널리 보급됐다. 원래 조선은 인재 양성에 초점을 두어 원칙적으로 학교 출입에 신분적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초 중종 때에 이르러 사족의 양반 신분제가 고착되면서 사족 자제들의 양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향교에 출입하기를 기피한다.

따라서 향교는 교생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특전을 악용하려는 피역자들의 소굴이 될 뿐 학교로서의 기능은 갈수록 약화됐다. 이러한 이유로 사족자제들만 위한 사학인 서재(書齋)가 생겨났다. 전직 관료나 유능한 강사가 운영하는 서재는 사족들의 과거 합격을 위한 오늘날의 전문적인 입시학원 형태와 비슷했다. 이런 전문 서원에서는 학문과 이성을 기르는 전인교육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고 향교는 질이 저하돼 학교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족 자제들은 출세를 쫓아 과거공부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인성교육이 부재하자 퇴계 이황(李滉·1501~1570)선생이 주희(朱熹 ·1130~1200)의 예를 끌어와 조선의 알맞은 서원제도를 마련하고 그것의 보급에 진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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