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옥윤 (논설위원)
그해 늦가을은 을사늑약의 해, 그 즈음 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샛노란 은행잎은 가없이 지고 있는데 날씨는 이른 겨울을 예고하듯 함박눈이 눈앞을 가렸다. 신군부가 세상을 지배해 시국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고 세상은 모든 자유를 억압당한 채 공공 얼어붙었다.
▶1980년 11월 셋째주 화요일(11월 24일) 경남일보는 신문협회의 결의라는 강압된 미명 아래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이라는 명예를 뒤로한 채 지령 9342호만에 폐간호를 발간하고 문을 닫았다. 1909년 10월 15일 ‘민지(民智)개발과 실업 장려’라는 사시(社是)아래 창간한지 71년만의 일이다. 그해, 언론정화라는 명목아래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통폐합되거나 문을 닫았다.
▶그날을 추억하면 수많은 시민들이 조문하듯 신문사를 방문, 서로를 격려하며 내일을 기약했고 경남일보는 이에 보답하듯 ‘북풍한설 속 연면(連綿)했던 불사조의 기개’라는 제목의 폐간사를 끝으로 윤전기를 멈췄다. 기자들은 폐간에 앞서 지금의 창원에 있는 초대 주필이었던 위암 장지연선생의 묘소를 참배, 내일을 기약했다. 42년전의 일이다.
▶그러나 경남일보는 폐간사처럼 불사조처럼 죽지않고 살아나 수령 113년의 낙락장송이 되어 ‘향토의 횃불’임을 자임하며 지역을 지키고 있다. 책임과 시대적 소명도 잊어본 적이 없는 불사조의 정신은 곧 경남일보의 기개다. 그러나 그해 만추의 상처는 옹이가 되어 남아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해 만추를 추억한다.
▶1980년 11월 셋째주 화요일(11월 24일) 경남일보는 신문협회의 결의라는 강압된 미명 아래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이라는 명예를 뒤로한 채 지령 9342호만에 폐간호를 발간하고 문을 닫았다. 1909년 10월 15일 ‘민지(民智)개발과 실업 장려’라는 사시(社是)아래 창간한지 71년만의 일이다. 그해, 언론정화라는 명목아래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통폐합되거나 문을 닫았다.
▶그날을 추억하면 수많은 시민들이 조문하듯 신문사를 방문, 서로를 격려하며 내일을 기약했고 경남일보는 이에 보답하듯 ‘북풍한설 속 연면(連綿)했던 불사조의 기개’라는 제목의 폐간사를 끝으로 윤전기를 멈췄다. 기자들은 폐간에 앞서 지금의 창원에 있는 초대 주필이었던 위암 장지연선생의 묘소를 참배, 내일을 기약했다. 42년전의 일이다.
▶그러나 경남일보는 폐간사처럼 불사조처럼 죽지않고 살아나 수령 113년의 낙락장송이 되어 ‘향토의 횃불’임을 자임하며 지역을 지키고 있다. 책임과 시대적 소명도 잊어본 적이 없는 불사조의 정신은 곧 경남일보의 기개다. 그러나 그해 만추의 상처는 옹이가 되어 남아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해 만추를 추억한다.
변옥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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