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6)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6)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1.2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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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서울대 명예교수) 선생은 ‘수필의 영역 확대와 그 문학성’에서 ‘수필에 쓰이는 글월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전은 땅에 떨어졌다’는 부족하다. ‘땅에 떨어진 동전은 땡땡소리를 내면서 뛰면서 굴러갔다’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을이 왔다’를 ‘계절의 여신은 산모퉁이로부터 나무들을 단풍으로 물들이면서 이 고장에 찾아왔다’라야 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결국 회화성, 음악성으로 대표되는 감각성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말에 의해서 창조되는 예술인만큼 작가는 특히 우리말을 갈고 닦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형태 요소가 극도로 발달한 우리말은 조사와 어미변화에 따라 리듬과 뉘앙스가 달라지므로 그 독특한 묘미를 살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수필은 산문이니만큼 글월에 음악성(리듬)이나 회화성(묘사) 나아가서는 뉘앙스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글지이들의 그런 관념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꽃과 잎을 구별하지 못하는 눈병에서 온 오류지요. 글꽃글은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생활글(저널리즘)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김기림. 길.)

“(…)시계는 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늙은이의 희멀건 눈이 띄어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턱에 매달린 흰 수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죽어야지! 집에 가서 죽어야지! 금방이라도 또 늙은이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기차는 아직도 숨이 가쁘게 어두운 밤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칙칙 펑펑 언덕을 기어오르고 산의 굴을 뚫으면서 아직도 추풍령고개를, 우리나라의 지붕인 추풍령고개를 넘어가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이북에 있는 나의 집을 한번 다시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기차는 아직도 숨찬 소리를 내면서 추풍령을 넘어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도 별도 새벽도 없는 캄캄한 밤을 기차는 그냥 내달리고 있었다.”(한흑구. 밤을 달리는 열차.)

‘길’은 시요 ‘밤을 달리는 열차’는 수필이다. 다들 그렇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매깁니다. ‘길’이 시라면 ‘밤을 달리는 열차’도 시다. ‘밤을 달리는 열차’가 수필이라면 ‘길’ 또한 수필이다. ‘상실’을 표현하는 모양새가, 글월이 흘러가는 음악성이나 상심을 울리는 뉘앙스나, 비유와 여백의 묘미가 판박이라 할 만큼 닮아있습니다. 쓰임새가 같지요. 시다 수필이다 갈래를 따져 무엇하겠습니까? 다 같은 말꽃인 것을. 시수필·수필시, 이 두물머리가 사람 사는 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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