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남계서원의 배향인물
[경일춘추]남계서원의 배향인물
  • 경남일보
  • 승인 2022.11.2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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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구 (남계서원 원장)
이창구 남계서원 원장


현재 남계 서원의 사당에 모셔져 있는 신위 중, 두 번째로 배향된 분은 동계(桐溪) 정온(1569-1641)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초계, 자는 휘원, 호는 동계, 고고자(鼓鼓子)이다. 별제 정옥견(鄭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숭지, 정숙(鄭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저서로는 덕변록, 동계집 등이 있다. 1606(선조 39년)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해 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을 역임했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廢母論)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광해군이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 하도록 명했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궁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을 지어 자신을 반성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돼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 밑 고향으로 돌아가 조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 생을 마감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해 영의정에 추증됐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에게 사사해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선조 40년) 정인홍이 유영경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고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것은 영창대군의 옥사 때 상소나, 대청(對淸)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허목(許穆), 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 정구, 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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