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세상
[경일시론]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세상
  • 경남일보
  • 승인 2022.11.2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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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정재모 논설위원


‘왕이 죽었다. 얼마 후 왕비가 죽었다.’ 스토리와 플롯을 설명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 문구다. 두 문장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맥락이 없다. 그저 무미한 두 개의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왕이 죽었다. 그 슬픔으로 왕비도 죽었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구체성과 인과관계가 형성되어 진실처럼 보이고 호기심을 유발한다. 주지하듯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 사실의 나열이고 플롯은 그것들을 인과관계로 엮어놓은 것이다.

플롯(plot)에는 ‘구성’이란 뜻 외에 음모(陰謀)라는 의미도 있음을 곱씹어 볼만하다. 곧 어떤 목적이 감춰진 허구인 거다. 한 달 넘게 흥미를 돋우어 온 ‘청담동 술자리’ 의혹은 핵심 부분이 허구였다. 애초 발설한 여성이 스스로 밝혔다. 이 허구엔 플롯이 있었다. 폭로의 진위 공방이 지난주 얼추 매듭되면서 그것이 보였다. 단순한 스토리를 플롯으로 바꾼 건 얍삽한 몇 조각 낱말이었다.

ㅡ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지난 7월 19일 자정께 청담동의 한 바에서 술을 마셨다. 법무법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 30여 명과 어울려 새벽까지 음주가무로 난리를 피웠다. 대통령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렀고, 한 장관은 윤도현 노래를 부르더라. 나는 첼로로 반주를 해줬다ㅡ. 이밖에 술집 위치, 그랜드피아노, 밴드마스터의 존재 같은 현장 정경과 상황 설명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더란다.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라 했다(의혹을 처음 폭로한 의원).

그림을 그린 듯한 현장 묘사 탓에 진짜임을 믿었다는 거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참된 얘기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셍긴 노래 제목과 소품, 현실의 인명들이 스토리를 플롯으로 전환시킨 접속어 역할을 했나. 그렇다면 옮긴 이의 귀가 그리 여린가 싶어 한심스럽다. 귀가 여리면 입이 가볍다고 했다.

첼로를 켜며 술자리 도우미 노릇을 했다는 이의 말이 모조리 거짓은 아니었다. 녹취록 내용과 엇비슷한 위치에 그가 드나들며 첼로를 켰던 술집이 있었다. 특정일 밤 10시까지 그 술집에서 첼로를 켜기도 했다. 등장인물의 하나인 전 자유총연맹 총재대행인가 하는 이도 거기서 술을 먹고 간 의심이 드는 모양이다. 그 말고는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그 여성이 실토했다. 대통령, 법무장관, 변호사 30여 명, 음주가무 같은 핵심 내용들이 모두 허구였다는 것. 말하자면 약간의 사실에다 멋대로 살을 붙인 거다.

이걸 두고 ‘체험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말’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처음 문제를 터뜨린 야당 대변인이 그랬다. 그를 옹호한 다른 의원도 그랬고 종편 방송에 나온 야당편 토론 패널들 역시 교묘하게 ‘개연성은 있다’고 주장했다. 내심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보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들이 처음부터 거짓인 줄 알면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같은 편이라서 옹호하고, 대통령과 장관을 무고하기 위해 기획한 억지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꺾고 싶은 이름들을 듣자마자 ‘잘 걸렸다’며 환호작약하다 거짓에 벌러덩 속은 걸로 본다. 그랬더라도 사실이 아닌 게 드러났으면 쿨하게 사과할 일이다. 그러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나. 미련이 남은 걸까.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후 비슷한 일이 또 있거든 잘 살펴 보고 폭로하든지 편을 들든지 하길 바란다. 상황 설명이 구체적이라 해서 다 믿을 말일 수는 없다. 치매환자들의 망언은 처음 가족마저도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실(寫實)적이란 얘기를 우리는 종종 듣는다. 문예물의 성애 묘사가 꼭 작가 자신의 직접 체험담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이고 천연덕스러워 가짜를 진짜로 치면 진짜배기 진짜는 어떡하나. 가짜를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만드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말 특권 많이 가진 국회의원들은 특히 경계하고 또 삼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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