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남계서원의 배향인물
[경일춘추]남계서원의 배향인물
  • 경남일보
  • 승인 2022.12.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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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구 (남계서원 원장)
이창구 남계서원 원장


남계서원에는 서원을 창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선생도 모시고 있다. 그는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 때의 뛰어난 선비이다.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송암(松庵)이다. 본관은 진주, 주거지는 함양 효우촌이다. 당공 정희보(鄭希輔)와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일찍이 당곡 정희보에게 나아가 학문 배우기를 청하니, 정희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1549년(명종 4) 진사에 합격했음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 뒤에 남명을 찾아가 유학을 깊이 연구해 학문이 더욱 진보했다. 1552년 남계서원을 건립해 정여창을 제향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1566년(명종 21) 조식의 문하생으로서 경상도 유생 33명을 모아, 그가 소두(疏頭)가 돼 성종조의 명유(名儒) 정여창(鄭汝昌)을 신원시켜 달라고 조정에 탄원했다. 또 유생들에게 서원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내고 사판(祠版)을 봉안한 다음에 봄·가을로 유생들을 이끌고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서원의 정액(旌額)을 하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장고(狀告)를 접한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姜士尙)이 명종에게 유생의 건의를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자 명종이 정여창을 신원시켜주고, 서원에 ‘남계서원(南溪書院)’ 편액을 하사했다. 1567년 때마침 선조가 즉위해 재야의 어진 사람들을 조정으로 초청했는데, 그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던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그를 추천해 마침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에 임명됐다. 그러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 함양으로 돌아갔다. 두류산을 좋아하며 귀동(龜洞)의 산수 좋은 곳-신동국여지승람에 오도봉 아래 등구사라는 절이 있는데 산형이 거북과 같고 절은 그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해 등구사라 불렸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창원마을이다. 땅을 사고 집을 지어 거기에서 평생을 바칠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병으로 죽으니 45세였다. 묘소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의 남동쪽 언덕에 있으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 1581년(선조 14)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1642년(인조 20)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개암집(介庵集) 2권이 있다. 오늘날 남계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일두 정여창 선생이 동국 18현 중 일인으로 추앙받고 있고 좌안동, 우함양이란 함양인의 마음속의 우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도 개암선생의 선비정신이 그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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