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 정조의 금주령 해제
[경일춘추]“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 정조의 금주령 해제
  • 경남일보
  • 승인 2022.12.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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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7년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휩쓸고 간 자리,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고 농지 80%가 황무지가 됐다. 경복궁 화재로 노비문서와 토지대장도 사라졌다. 국정 최고 기관인 비변사에서는 ‘여민휴식(與民休息)’을 선포했다. “국민과 같이 휴식하며 안정 속에 힘을 기른다”는 조선판 뉴딜이었다. 조선이 반세기만에 복구되자 음식사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확산됐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는 오래가지 못 했다. 몇 년 후 대기근으로 인구 약 100만이 굶어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대기근은 1660년 경술년에서 1661년 신해년에 끝났다. 가뭄과 폭우, 6차례의 태풍으로 백성들은 터전을 잃었다.

53년간 재위했던 영조는 철저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을 빚거나 마시다가 적발되면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갔으며, 참수를 당한 자도 있었다. 무려 십년에 걸친 이 가혹한 금주령은 정조대에 해제됐다. 우후죽순처럼 술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양 상점의 절반이 술집이었다.

정조는 소통을 강조했던 군주였다. 신하들과 잦은 회식을 가졌다.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不醉無歸)”는 정조의 어명이었다. 술 빚을 곡식을 걱정하지 않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술은 더 이상 죄악이 아니었다. 같이 차려지는 진주교방음식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기도 이즈음으로 본다. 진주 관아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술이 있었다. 잣술, 후추술 같은 희귀한 술도 기록돼 있다.

공식적인 술은 소주였고 여름에는 주로 차게 마시는 막걸리인 합주였다. 진주 소주는 원래 민가의 양조장에서 빚어 관아에 공물로 바치던 품목이었다. 1909년 일제는 주세법을 제정해 민간의 술 빚기를 금했고 진주 고유의 소주대신 영남학(嶺南鶴)이라는 술을 제조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18세기 잔칫상에는 붉은 대추와 꿀로 소를 넣은 송편, 따뜻한 연근 감자조림. 하얗게 분이 나는 준시가 있었다. 마른 전복에 꿀과 참기름, 간장을 넣어 조린 투명한 감복도 올랐다. 멧돼지 고기와 곰고기, 넙치로 만든 어포와 누치 생선탕도 귀한 술안주였다. 교방음식에는 술이 필수다. 본 재단에서는 고증을 통해 진주 전통주를 곁들인 교방음식 코스를 개발 중에 있다. 그릇은 관아에 납품하던 함양 꽃부리징터의 맞춤 유기다. 천 번을 두드려 만든다. 수저와 유기가 부딪칠 때 들리는 소리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천년 고도 진주교방음식이 한식 세계화의 큰 울림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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