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9)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9)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2.1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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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연못이 하나 있는데 가운데 반석이 하나 있다. 거기 앉아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를 하면 개구리들이 기어 올라온다. 날이 추워지자 개구리들이 굼떠지더니, 겨우내 못물이 깡깡 얼어서 개구리를 볼 수 없었다. 봄비가 오고 얼음이 녹아서 들여다보니 개구리들이 다 죽어있었다. 시체를 건져내서 묻어주었다. 그러고 다시 보니 그래도 안 죽고 살아있는 것들이 저 밑에 두어 마리 있었다. 다행히 다 죽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며 들으며 살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좋은 글감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일상에 있는 이런 사소한 일들이 사상과 사유를 입으면 글이 됩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그림을 찾아 그려내면 그게 말꽃이 되는 거지요. 어때요? 이 연못에 개구리 이야기를 한 번 써봐요? 말꽃이 되게. 에세이·수필은 긴 글이니까 당연히 이야기를 수반하게 됩니다. 시가 풀꽃이라면 에세이·수필은 나무꽃이니까요.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 터가 생겼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이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하며 또는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것은 못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큰 변사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와군(蛙君)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얇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린 후로는 기도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하기 무려 수개월 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꾸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가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아니한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 혹한에 작은 담수가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凍死)한 개구리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절명은 면했나 보다.”-

김교신(1901-1945) 선생님께서 쓰신 조와(弔蛙)입니다. 이 글이 선생님을 왜놈들의 감옥에서 돌아가시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구가했다는 죄로 왜놈들이 잡아갔다는 거지요.

못 가운데 있는 하늘이 만들어 놓은 성전인 반석이 우리나라를, 와군(蛙君)들은 우리 겨레를 이릅니다. 못 안에는 미꾸라지도 있고 송사리 붕어들도 있겠지만, 사람과 개구리의 닮은 꼴을 살려서, 개구리를 골라 쓰고, 와군(蛙君), 군(君)을 붙여서 나라를 살려내려는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물을 얼려 숨을 못 쉬게 하여 와군을 죽게 만든 얼음 빙괴(氷塊)는 왜정이지요. 봄비 쏟아지는 날 새벽이 오면 빙괴도 다 풀릴 거라는 애틋한 희망 사항을 이미 있은 일처럼 표현했습니다. 이건 필연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글짓기에서 흔히 쓰는 말법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내신 우리 어른들은 이 ‘봄비 쏟아지는 날 새벽’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이 간절한 기원을 비유로 담은 거지요. 비유라는 나무에 피면 말이 꽃이 됩니다.

‘참수필짓는이야기’·‘한그루나무처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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