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50)보는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50)보는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2.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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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쓰는 것이요 짓는 것은 말이다. 글을 짓는다는 바른말이 아니다. 말에 꽃을 피우는 것은 말이지 글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글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말을 짓는 거지요.

세상 살면서 내가 나타내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과 생각, 감정이지요. 내 마음을 헤아리고 생각하고 감정을 읊어서 그것을 내가 알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 헤아리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낍니다. 따라서 말로 표현하는 거지요. 내 마음 내 생각 내 감정을 남에게 나타낼 때도 말로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말을 지어야 하는 거지요. 글짓기를 먼저 하면 글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글이 곧 마음이다’가 아니라 ‘말이 곧 마음이다’이며 ‘글이 곧 말이다’가 아니라 ‘말이 곧 글이다’이기 때문입니다.

글 다듬는 법을 가르치는 문장작법을 보면 거의가 말을 죽이도록 가르칩니다. 글자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음악도 없습니다. 말은 높고 낮고 길고 짧고, 소리에 색깔까지 있어서, 감정과 음악을 뜻 뒤에서 허밍 하지만 글자로 적힌 글은 돌덩이와 같습니다. 글줄에 감정과 음악이 흘러 제대로 말맛이 나도록 표정까지도 살려내는 것, 이것이 바른 문장법입니다. 말이 안 되는 걸 말꽃이라 우기면, 부끄럽겠지요.

원래 말은 내 것이 아니지요. 이 사회가 같이 쓰는 물건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있었고, 이미 있은 이름씨와 움직씨들이요 토시들입니다. 이 낱말들은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써져 오면서 사회의 소유물이 되었지요. 그러기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뭣에 부딪혀 생기는 내 생각이나 감정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미 경험한 낱말이나 표현 방법으로는 시원하게 쏟아지지 않을 때가 많지요. 내 뜻이나 감정에 ‘딱’하고 맞아주지 않으니까요.

현대를 개성시대라고 합니다. 표현의 자유란 말도 쓰지요. 내 생각이나 감정이나, 내 마음은 내 말로 (남이 다 쓰는, 소속이 사회에 있는 말이 아닌) 말해야 하는 거지요. 이미 익어버린 만인에 의한 만인의 문장인 투식문장(套式文章)을 쓰면서 스스로 멋있어하신다면(세상에서 그렇게나 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이는 마음이 이미 죽어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생과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참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소설가 폴 모랑(1888-1976)이 한 말이라 합니다. 산 사람은 생활 그 자체가 언제나 새로울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이제에서 어제로 가는 법이 시간에는 없으므로 어제보다 이제가 새로운 것이요 우리의 삶 자체가 새것을 맞이하는 행위이니, 새로운 것에는 새로운 표현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씀에 형식이 없다는 글, 에세이·수필이 가장 자유롭게 마음대로 쓰는 글일진대, 수필이 아니더라도 그에 걸맞게 낱말도 만들고 표현도 더 새뜩하게 해야겠지요. 이상은 ‘날개’의 첫 줄에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라 쓰고, 페이터는 인생무상을 역순법을 빌어 나뭇잎에 구워냈습니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우리로하여금 미처 몰랐던 무엇을 생각하게 깨닫게 하는 것, 그게 새로운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앙드레 지드가 한 말입니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말은 허턱 써지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참수필짓는이야기’·‘한그루나무처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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