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다사다난(多事多難)
[경일시론]다사다난(多事多難)
  • 경남일보
  • 승인 2022.12.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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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재 (논설위원·한국인권사회복지학회 학회장)
정승재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10대 선진국 반열에 든 지금의 잣대로는 믿기지 힘든, 흑역사의 하나로 꼽힐 박정희시대의 유신헌법이 장대할 때가 있었다. 50년전 쯤의 초등학교 다닐 때다. 신문과 방송에서 ‘긴급조치’라는 용어가 가끔 등장했다. 누가 잡혀가고, 구속되고 하는 등의 좀 무서운 뉴스가 많았다. ‘기자회견’ 이라는 말도 눈에 자주 들어왔다. 새해 벽두 대통령 기자회견 때는 언제나 ‘다사다난’이라는 수식어로 말이 풀렸다. 그래서 긴급조치, 기자회견, 다사다난은 높은 사람의 전유 용어로 알았다.

어라? 그즈음 조 프레이저인지 죠지 포먼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들과 일전을 벌이는 무하마드 알리의 ‘기자회견’이란 게 뉴스로 다가왔다. 그 말이 보통사람에게도 통용되는 것임을 곧 알게 된 계기였다. 그때의 헌법에 명문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단순한 행정명령이 아닌, 법률적 구속력을 지닌다는 사실은 유신시대가 끝날 때 쯤 정확한 의미가 머리에 앉혔다. 다사다난, 조례 때 교장선생님의 ‘훈시’에서나 폼이 좀 잡혀야 하는 사람의 인사말씀 중 연말이면 늘 듣던 말로 기억한다.

‘국민의 힘’ 전신이었던 한나라당과 통합으로 소멸된 자민련 홍보국장으로 일한 때가 있었다.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2000년, 꼭 22년전의 일이다. 발행인으로 당보(黨報)를 만드는 일이 주종의 하나였다. 연말 당 지도부 신년사 집필이 당연 직무였다. 지금의 당 대표를 총재로 일컫던 때다. 총리서 물러난 JP가 명예총재로, 현직 총리였던 이한동이 총재로, 6선에 현역 국회부의장 김종호의원이 총재권한대행이었다. 여기에 당 3역으로 불리던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원내총무(대표)의 몫까지 모두 여섯 분의 신년사를 쓰야 했었다. 같은 날 같은 신문에 6편의 신년사, 단골메뉴 ‘다사다난’도 한 두 번이지 참 난감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비슷한 말인 다사다망(多事多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좋은 일 궂은 일로 채워진 등으로 대체될 수 있는 말이지만 제일 유연하고 무난한 말 같다. 2023년 새해를 불과 며칠을 남겨준 이때, 누구를 막론하고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딱이다. 초봄 매화와 개나리로 시작된 꽃의 향연이 활력을 주고, 가로수 그늘에 냉면으로 더위를 지내며, 초가을 ‘매미’와 대비시키며 태풍 공포에 빠지게 했던 ‘힌남노’의 허풍에 안도했고, 끝자락 가을에 이태원 참사로 국민적 애도기간을 거치고 월드컵 16강의 환희를 맛보며, 코로나 위세로 3년 정도 가지지 못했던 크고 작은 송년모임의 절정에 있는 지금에 있다. 가족과 친지나 동료 등 지인의 안녕과 불행, 어쩌면 그들의 죽음으로 생과의 단절을 겪은 일, 모두가 살만한 세상살이의 대가다. 그야말로 다사다난의 소용돌이다.

사람은 경험을 저장하는 기억을 달고 산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시간적 지속성을 기준으로 작동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누기도 한다. 전자는 관심과 흥미에 따라 경험을 의식에 놓는다. 생활의 순간순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긴급조치’나 ‘기자회견’이 그 영역이다. 반면, 찰라적 감각통로가 아닌,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서서히 영속적으로 뇌리에 자리잡는 의식을 장기기억으로 분류한다. 집안의 대소사, 직무적 일상, 가슴 설레는 연인관계, 수십년 지기의 학교동창과의 연분 등이 여기에 속한다. 긍정적 장기기억이 더 풍부하고 또렷하면 행복지수가 커진다. 누구한테도 달려든 한해의 다사다난, 장기기억만 있을리 없다.

기억이 억지로 조절되기는 어렵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먹기에 달렸다. 땀 흘릴 각오가 서면 덥지 않다. 연말의 한파도, 이것쯤이야 싶으면 춥지 않다. 또 내년의 새로운 다사다난이 기다리고 있다. 추위의 기세에도 두달쯤 후면 매화 봉우리가 솟는다. 만고불변의 섭리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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