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한해를 보내며 ‘순이’를 추억하다
[현장칼럼] 한해를 보내며 ‘순이’를 추억하다
  • 이은수
  • 승인 2022.12.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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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수 창원총국 취재팀장


한해를 갈무리하는 시점. 진해구청 지하 창고에 잠자고 있던 ‘107령공양지탑’을 비롯한 유물들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 일제시대 진해 대화재 관련, 오랜기간 상자에 묶여 있던 107명 위령비(百七靈供養之塔)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

돌덩어리(석비)가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어두운 지하 계단 아래, 낯익은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해 진해 제황산 정상을 깎아 기념탑을 세웠고, 1930년 3월 10일 일본 육군기념일에 진해요새사령부 가설영화관에서 어린이 대상 전쟁영화를 상영했는데, 화재로 107명이 불에 타 죽었다. 이 중 유일한 조선인으로 밀양 출신의 박순이(朴順伊)가 포함됐다. 당시 일본의 대판매일신문에 기사화 될 정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진해콩을 만들던 아이카와(相川) 가(家)는 대화재로 3명의 자식과 보모였던 박순이를 잃었다. 진해콩 사장은 충격속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참사 일주년 위령제가 열렸고 공양비가 건립됐지만 세월의 부침속에 훼손이 심한 채 천리교 경내에 있던 것을 지난 2008년 진해시의 요청으로 이전했다.

구전해 오는 ‘제황산 산신령의 노여움’은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이 제황산에 승전탑을 세우기 위해 기초공사를 할 때로 거슬러 간다. 묘법사의 일본인 승려의 꿈에 나타난 산신령은 진해를 지키는 혼령으로 형상화돼 있다. 여러 공사 중의 사고에서 일본인들만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주민들의 항일 정신과 맞닿아있다. 제황산의 노여움과 순이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늦은감이 없지 않지만 박물관으로 옮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로 한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본보 보도 이전까지 위령비가 세상에 나오지 못한것은 현상에 대한 이해 부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제 잔재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 순이 만큼은 우리가 기억했으면 한다. 순이는 힘없는 나라 백성으로 살다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일본 육군의 영웅 노기 장군의 사적을 그린 영화를 보는 일본 아이들과는 무관하게.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스러져간 영혼은 누가 달래나. 일본은 바다를 제압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으로 웅천을 진해로 부르고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진해는 비상하고 있다. 2040년까지 총 15조원을 투입해 건설하는 진해신항 프로젝트가 본격 시행된다. 진해신항이 완공되면 부산신항과 함께 세계 3위권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돋움할 전망이다.

유라시아로 뻗어가는 진해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500억원대 국책사업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공모사업’에도 선정돼 거는 기대가 크다. 창원시정연구원은 ‘해양항구도시 진해의 역사와 미래’ 세미나를 갖고,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역사 의의를 살펴보고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을 모색했다. 중원로터리 일대는 골목 골목 숨은 근대사뿐만 아니라 김구선생 친필서명과 이승만 동상 등 한국사 정치적 라이벌의 역사까지 남아있다.

내일을 알려면 역사적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언명했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단재 선생을 연구한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다. 진해시대 소통공간으로 역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며, 근현대사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 진해에는 순이 외에도 숨겨진 역사가 많다. 일본의 악행 등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바르게 알려야 할 책무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한해의 끝에서 잊혀진 이름, 조선인 ‘순이’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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