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빠리 개조사업을 주도한 오스만 남작
[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빠리 개조사업을 주도한 오스만 남작
  • 경남일보
  • 승인 2022.12.2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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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빠리의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조르쥬 으젠느 오스만(Georges Eugene Haussmann)은 꽁도르세 고등학교(lycee Condorcet)를 거쳐 빠리 음악 대학(conservatoire de musique de Paris)을 다니면서 법학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1830년대 초부터 정계에 입문하면서 빠리 인근 여러 지역의 부지사를 거쳐 1849년부터 바르(Var) 주 지사를 시작으로 욘느(Yonne) 주 지사, 지롱드(la Gironde) 주 지사, 그리고 1853년부터 1870년까지 빠리의 세느(la Seine) 주지사를 역임하게 된다. 1857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상원의원직도 겸하면서 제 2 제정의 나뽈레옹 III세가 구상한 빠리개조사업(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e Empire)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19세기 중반, 빠리는 중세 도시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여러 차례에 걸친 재건축 사업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서 산업시대인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증가한 인구를 수용하기엔 루이 XIII세 시절의 성곽도시는 너무나 비좁고 미궁같이 얽힌 도로는 만성적인 교통 혼잡을 불러 일으켰다. 좁은 거리에다 비위생적인 주택들은 질병의 온상처럼 여겨졌다. 도심이 점차 지저분해짐에 따라 부유층은 북서부의 교외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중심지역은 점차 빈민화 되어감에 따라 정치적 저항의 위험까지 초래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급기야 당국은 근본적인 해결책의 모색을 요구받기에 이르게 된다.

나뽈레옹 III세는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산업혁명을 거치며 변화한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런던에는 수많은 공원들과 잘 정비된 가로수들, 근대적 설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를 미적으로 아우르는 도로망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나뽈레옹 III세는 곧 대규모적인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사업은 빠리 중심부와 외곽지역에 걸친 대대적인 빠리 근대화를 위한 도시계획으로 1853년 7월에 세느 주 지사로 임명된 오스만에게 “도시의 환기와 미화, 조화 통일”의 임무가 부여되게 됐다. 빠리 개조 계획은 중심부부터 외곽지역 전체를 포함했으며, 도로와 대로, 건물의 방향, 공원, 도로설비, 배수·급수시설, 편의시설과 공공 기념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행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징발하던 개발초기에 지주들은 국가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기꺼이 토지를 헌납했다. 1859~1860년간에 행정부는 2만여 채의 가옥을 철거했는데, 도로가 정비된 1852년에서 1870년 사이에 4만여 채의 건물을 새로이 건립했다. 건물들이 철거된 지역에는 새로운 도로들과 급수시설, 가스공급, 하수처리 시설 등이 건설됐다. 오스만은 거리의 시설과 기능을 설계하고 정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간건축물에 대한 미적 효과까지 염두에 두고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예컨대, 1859년 규정에 따라 건물의 높이는 지면에서부터 20m 이상은 돼야 했고, 지붕의 각도는 반드시 45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도심가의 개발로 임대료가 상승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은 시의 외곽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하면, 몇몇 계획으로 인해 사회적 불균형이 초래되면서 빠리는 부유한 서부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개조사업이 진행되자 빠리 오페라를 설계하는 등 신바로크 건축양식을 주도한 갸르니에(Jean Louis Charles Garnier)와 같은 수많은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숨막힐 듯한 단조로움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또한 정치인들과 에밀 졸라 (Emile Francois Zola)와 같은 작가들은 투기와 부패에 대해 고발하는가 하면, 자신의 사재까지 투입했던 오스만의 재산에 대해서도 부당한 시비를 걸기도 했다. 당시 개조사업은 막대한 자금이 투하됐기에 엄청난 비난이 일기도 했으나 한 세기가 지난 후부터는 오히려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도로와 건축물들 그리고 그림 같은 광장들은 프랑스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이목을 빠리로 이끌게 되었다.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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