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영남 군사행정 중심 진주성 중영 복원
[신년특집]영남 군사행정 중심 진주성 중영 복원
  • 최창민
  • 승인 2023.01.0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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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도시 진주의 자부심 영남웅도를 증명하라
진주성은 천년 역사도시 진주의 상징이다. 1592년 임진년 대첩지이자 이듬해 계사년에는 진주의 민·관·군 7만여 명이 나라를 지키려고 왜군과 맞서다 순절한 의로운 역사 현장이다.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1603년 당시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을 남강이 감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 진주성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경상우병영을 품은 진주성은 경상우도 군사 중심지이자 영남의 중점 방어기지로서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됐다. 경상우병영의 수장 경상우병사는 종2품 관직으로 1603년부터 1634년까지 진주 목사직을 겸했으니 진주성 내의 경상우병영은 서부 경남 행정의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다. 1603년 진주로 첫 부임한 경상우병사 겸 진주목사는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이다. 그는 효종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북벌의 중심인물 이완 포도대장의 아버지이다.

 
규장각 소장 진주성도에 표현돼 있는 ‘중영’
◇영남군사행정 중심지 복원의 열망

조선말인 1894년 행정제도 개편으로 경상우병영은 혁파(묵은 기구 제도 법령을 없앰)되면서 기능을 상실했고 1896년 그 자리에 경남도청이 들어섰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을 하자 다시 옛날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급기야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진주성 정화작업을 통해 그 자리에 들어섰던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상부에 복토작업을 진행한 후 잔디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진주시는 1972년 촉석문 복원을 시작으로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했다. 1979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했고 2002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의 건물은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성의 옛 모습 복원을 바라는 진주시민들의 열망이 강한 가운데 진주시는 영남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던 경상우병영 복원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 12월 13일에는 조규일 진주시장을 비롯해 양해영 진주시의회 의장, 고영진 경남일보 회장 등 지역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의 중영(中營)건물지에서 중영 복원 착공식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중영은 영남웅도를 증명한다

이번에 복원되는 경상우병영의 중영은 공북문과 영남포정사 문루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경상우병영의 우후(虞候)군영이었다. 우후는 경상우병영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외관직의 무관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으로서 우병사 다음으로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경상우병사의 근무처인 운주헌(運籌軒)아래에 위치한 중영은 경상우도 병무 중심지이며 영남의 중점 방어기지로서 천년도시 진주가 영남웅도(嶺南雄都)임을 증명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소장 진주성도에 표현돼 있는 ‘중영’
◇정당 복원사업 2023년 하반기 준공

진주시는 그동안 중영의 중심 건물인 정당(正堂)을 복원하기 위해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년간 진주성 내 중영 문헌과 시굴조사, 정밀조사를 완료했다. 2021년 2월 중영 정당 복원을 위한 실시설계 용역에 착수해 2021년 11월 문화재청 현상변경 허가를 받았다. 이어 2022년에는 문화재청과 세 차례 자문회의를 거쳐 지난 10월 최종 문화재청 설계도서 승인을 받았다.

이번 중영 복원사업은 총사업비 17억원을 들여 정면 7칸, 측면 3칸, 1고주 5량가, 연면적 1만 461㎡ 규모로 이뤄지며 2023년 하반기 준공 예정이다.



◇헌병대 본부, 세무서…격동의 역사

원래 중영에는 이번에 복원하는 정당(正堂)외에도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우후가 일을 보던 중영인 찬주헌(贊籌軒), 우후의 접객과 보조 집무공간인 망일헌(望日軒), 고위관리의 출입을 모시는 하급 아전인 배리의 집무장소인 배리청(陪吏廳), 경상 우병영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아전 진무의 집무장소인 진무청(鎭撫廳), 군아와 감영에 속한 장교가 근무하던 장청(將廳) 등이 있었다.

중영은 1894년 경상우병영이 혁파되면서 기능을 상실하고 1906년 경찰업무를 전담하는 경무서가 중영의 부속건물인 진무청과 배리청 자리에 세워졌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일제의 경남도 헌병대 본부가 경무서 자리에 조성됐다. 1934년 옛 헌병대 본부 자리에 진주 사천 산청을 관할하는 세무서가 조성됐다.

 
 
조규일 시장은 “진주성 내 중영 복원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이후 무분별하게 훼손된 주요 시설을 순차적으로 복원해 진주성의 제 모습을 되찾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며 “역사·문화도시인 진주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복원된 시설은 향후 역사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진주성 중영 복원은 진주성 복원의 첫걸음이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웅도로서의 긍지를 나타낼 경상우병영의 복원은 우리 진주의 역사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일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경상우병영 중영 복원을 시작으로 앞으로 진주성이 제 모습을 찾는다면 진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문화 관광도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진주성 중영복원공사 착공식에서 조규일 시장, 양해영 시의장 고영진경남일보 회장 등 참석자들이 시삽하고 있는 모습.
[박스물]

◇첫 경상우병사 충무공 이수일

1603년 당시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이 남강이 감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 진주성으로 이전하고 첫 번째 진주에 부임한 경상우병사가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우병사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같이 시호를 충무공으로 받았다. 이수일 우병사는 1603년 진주로 부임해 1605년까지 3년간 진주에서 근무를 했는데, 진주 경상우병영의 초석을 다지는 일을 주로 했다.

창원에 있었던 경상우병영이 임진왜란으로 거의 폐허가 돼 진주에서는 우병영을 다시 세워야 했는데 진주성 증축 등을 이수일 우병사가 도맡았으며, 진주목사직도 겸해 임진왜란 직후 진주 백성들의 구휼(救恤·사회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하는 일)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1605년 길주목사로 임명돼 진주를 떠나자 진주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606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바로 ‘兵使兼牧使李公守一遺愛碑(병사겸목사이공수일유애비)’이다.

비문은 진주 수곡 출신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선생이 지었다. 이 비석은 현재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데 2021년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중영 정면도

 
 
중영터 발굴조사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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